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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흥산성과 7왕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1459
영어공식명칭 Seongheungsanseong Fortress and 7 Princes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3년 1월 21일 - 부여 성흥산성 사적 제4호 지정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2년 - 「성흥산성과 7왕자」 한민에서 발행한 『여기가부여다』에 수록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1년 7월 28일 - 부여 성흥산성에서 부여 가림성으로 사적 제4호 명칭 변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부여 가림성 사적으로 변경 지정
관련 지명 부여 가림성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성흥로97번길 167[군사리 산7-10]지도보기
채록지 구교리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윤충|일곱 왕자
모티프 유형 역사 인물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부여 성흥산성과 일곱 명의 왕자와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

[개설]

「성흥산성과 7왕자」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부여 성흥산성(扶餘 聖興山城)[부여 가림성(扶餘 加林城)]의 성주였던 윤충(允忠)과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일곱 왕자와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이다. 「성흥산성과 7왕자」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던 성흥산성에서 윤충이 일곱 왕자를 가르치고, 함께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열심히 싸웠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채록/수집 상황]

「성흥산성과 7왕자」는 1992년 한민에서 발행한 『여기가 부여다』에 수록되었다.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에서 마을 주민이 구술한 내용이 채록된 것이다.

[내용]

옛날 부여 성흥산성의 성주인 윤충은 무예가 뛰어나면서도 글에 소질이 있어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래서 백제의 일곱 왕자가 윤충의 손에 맡겨져 무예와 글을 배우고 있었다. 윤충은 백제에 대한 충성심과 나라를 흥하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왕자들을 가르쳤으므로 왕자들이 서로 조심하고 윤충을 따랐다.

어느 날 윤충이 왕자 풍(豊)을 불러 왜(倭)로 넘어가 동맹을 추진하라며 보냈다. 그리고 성격이 거칠고 의협심이 강한 한 왕자는 고구려로, 비교적 성격이 온순한 두 왕자는 신라로 보내 화친을 제안하였다. 또 한 왕자에게는 당나라의 환심을 사 오라면서 많은 조공물을 들려서 배에 태워 보냈다. 왕자들을 보낸 며칠 후 윤충의자왕의 부름을 받고 사비성(泗沘城)에 갔다가 윤충을 모함한 간신들에 의하여 반역죄로 죽음을 당하였다. 윤충은 목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나라의 미래를 준비하여야 한다고 외쳤으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성홍산성에는 세 사람의 왕자가 남아 있었다. 세 왕자는 윤충의 소식을 듣고도 핑계를 대며 그대로 성흥산성에 남아 있었다. 그즈음 각국에 보내진 왕자들도 귀국하였다. 다만 고구려와 신라는 아직도 백제 정복의 꿈이 있으며, 당나라는 신라에 기울어 있다 하였다. 왜로 넘어간 왕자 을 제외한 여섯 왕자는 이런 상황에서 백제가 살 수 있는 길은 조정의 간신들을 없애는 것이라 생각하여 군사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여섯 왕자는 왕자 만 돌아오면 사비성으로 진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왕자 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사이에 사비성은 나당 연합군에게 점령을 당하였다.

그러자 한 왕자가 일단은 때를 기다리자 하므로 다들 동의하여 주류성(走流性)으로 군사를 데려갔다. 사비성이 점령당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왕자 이 왜에서 돌아왔다. 일곱 왕자들은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나당 연합군을 상대하기에는 힘에 부쳐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고, 왕자만 혼자 살아남아 훗날을 도모하다가 일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부여 성흥산성에 가면 우물 자리가 남아 있다. 달 밝은 밤에 여섯 왕자들이 우물 자리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하늘로 올라간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일곱 왕자에서 한 명이 빠진 것은 왕자가 빠졌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모티프 분석]

「성흥산성과 7왕자」에는 윤충과 백제의 일곱 왕자라는 역사 인물 모티프가 담겨 있다. 백제 패망에 대한 안타까움과 끝까지 적에게 항거하려다가 죽은 왕자들의 의지를 담고 있다. 백제 유민으로서 망국에 대한 안타까움과 역사 의식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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