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교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430
한자 近代 敎育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헌주

[정의]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부터 1910년 일본에 의한 강제 병합 전까지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서 이루어진 근대식 교육.

[부여 지역 근대 학교 설립]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치던 대원군의 집권은 1873년 고종의 친정으로 막을 내렸다. 고종의 집권과 메이지 유신 이후 본격적으로 근대화 정책을 펴던 일본의 포함외교(砲艦外交)가 맞물리면서 조선은 1876년 2월 27일 일본과 ‘조일수호조규’[이칭 강화도조약]를 체결한다.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조선은 부산·원산·인천의 3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 화폐의 통용을 허가하는 등 일본과 근대적 통상을 시작하였는데 조선에는 근대화 정책으로 인한 변화와 저항이라는 흐름이 동시에 이어졌다. 개항과 여러 국가들과의 조약 체결, 갑신정변, 갑오개혁은 근대화의 큰 흐름이었고 임오군란 등은 근대화에 저항하는 흐름이었다. 고종은 국외 중립과 전제 군주제에 입각한 근대화 노선을 채택하고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한 후 자주적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광무개혁을 추진한다.

그러나 고종의 근대화 정책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한반도에서의 패권을 장악한 일본에 의하여 식민지적으로 변용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과 곧 이은 통감부 설치, 1907년 정미칠조약과 고종 강제 퇴위, 1910년의 한일 합병 조약은 일제 식민지화의 과정이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변화는 부여 지역에도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에서 근대 교육(近代 敎育)이 시작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인 교육 제도가 도입되면서부터였다. 갑오개혁기에 학부(學部)가 설립되고 근대적인 교육 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한다. 특히 대한제국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학부 주도로 전국 각지에 국공립 학교가 설립되었다. 아울러 1905년 이후 교육을 통한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던 계몽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근대 교육은 더 활성화되었다.

그 결과 1910년을 기준으로 전국에 설립된 소학교, 중학교, 사범 학교, 외국어 학교, 의학교, 상공 학교 등 관공립 학교 수는 82개[초등 59개, 중등 3개, 실업 16개, 전문 4개]였고, 사립 학교의 수는 2,082개에 이르렀다. 부여가 있는 충청남도 내에 설립된 근대 학교의 수는 1908년을 기준으로 공주 지역에 10개 학교가 있었고 학생 수는 446명이었다. 그리고 은진 지역에는 9개의 학교와 535명의 학생이 있었고 아산 지역에는 5개 학교 160명, 홍주[현 홍성군] 지역에는 4개의 학교가 있었고 학생 수는 238명이었다. 한편 공주와 홍주, 은진, 온양에는 공립 학교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1908년을 기준으로 부여 지역에 설립된 사립 학교 수는 총 11개였다. 전체 교원 수는 23명이었고 학생 수는 415명이었다. 부여 지역 최초의 학교는 1906년 1월 현내면[현 석성면]에 설립된 석양학교(石陽學校)였다. 그다음으로는 1906년 5월 현내면에 광동학교가 설립되었다. 1908년에 들어서면서 부여 지역에 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1908년 3월 홍산군 내북면[현 부여군 내산면]에 반상학교가 설립되었고 1908년 4월에는 군내면 북촌리[현 홍산면 북촌리]에 한흥학교가 설립되었다.

1908년 7월에는 초촌면에 흥명학교가 설립되었다. 1908년 5월과 1908년 6월에는 임천군수 김응규가 주도하여 천흥학교와 정법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밖에도 1908년 10월에 남산학교와 동흥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무렵 설립된 근대 학교에서는 과학과 산술 등 다양한 과목을 교육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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