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611
한자 扶餘 宮南池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서현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64년 6월 10일연표보기 - 부여 궁남지 사적 제135호 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0년~1993년 - 부여 궁남지 1~3차 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5년~2006년 - 부여 궁남지 4~12차 발굴 조사 실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부여 궁남지 사적으로 변경 지정
현 소재지 부여 궁남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지도보기
성격 연못 유적
면적 210,881㎡
소유자 부여군 등
관리자 부여군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백제 사비 시기의 연못 유적.

[개설]

부여 궁남지(扶餘 宮南池)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의 남쪽 사비도성 내 남쪽 저습지에 있다. 『삼국사기』 등 문헌 기록에서 확인되는 궁남지로 추정되는 백제 사비 시기의 연못 유적이다. 1964년 6월 사적 제13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사적으로 변경되었다.

[건립 경위]

부여 궁남지 관련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 35년(634)에 “3월에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이고 사방의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안에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 무왕 39년(638)에 “3월에 왕은 빈과 함께 큰 연못에서 배를 띄웠다”, 의자왕 15년(655)에 “2월에 망해정을 왕궁 남쪽에 세웠다” 등이 있다. 부여 궁남지 일대는 남쪽 금강의 배후 습지이자 동쪽 왕포천의 구하도인 관계로 자연적인 늪지가 형성될 수 있는 지형이다. 그런데 발굴 조사 결과 연못 내부와 주변에서 백제 사비 시기 수로나 수전, 건물지나 우물, 도로유구 등이 확인되지만, 연못을 판 흔적이나 물을 끌어 들이는 도수 시설 등이 모호하고, 문헌 기록에 보이는 연못 내부 섬과 사방의 언덕 등도 확실하지 않아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이라는 근거가 뚜렷하지 않다.

[위치]

부여 궁남지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번지에 있다. 부여 궁남지 일대는 ‘마래방죽’으로 불리던 저습지로, 남쪽에는 금강, 동쪽에는 이에 합류하는 왕포천이 있다. 궁남지의 동쪽 구릉에는 사비 시기 별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여 화지산 유적이 있고, 서쪽에는 백제 사비 시기 사찰인 부여 군수리 사지가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백제문화권 개발 정비 사업에 따른 복원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부여 궁남지 형태와 규모를 확인하고자 1990년부터 1993년 윤무병과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하여 부여 궁남지의 1~3차 학술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후 종합적인 발굴 조사 계획을 세워 1995년부터 2006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4~12차 조사가 실시되었다. 부여 궁남지 내부와 주변 지역을 연차적으로 조사하였는데, 1~3차는 부여 궁남지 서쪽과 부여 군수리 사지 사이, 부여 궁남지 북동쪽과 남동쪽 구역, 4차는 부여 궁남지 내부, 5~8차는 부여 궁남지의 서북쪽 구역, 8차는 부여 궁남지의 북쪽 구역, 9차는 부여 궁남지 남서쪽 구역, 10차는 부여 궁남지 남동쪽 구역, 11차는 부여 궁남지 일대 꽃가루 분석과 연대 측정, 12차는 부여 궁남지 서쪽과 부여 군수리 사지 사이 구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 유물 및 유물 포함층, 원삼국 시대 토탄층과 원형수혈 2기, 구상유구 2기, 백제 시대 수전경작면 2기, 수로 30기, 목조저수조 2기, 도로유구 1기, 가마터 1기, 건물지 8기, 우물 2기, 구상유구 4기 등이 확인되었다.

[형태]

백제 시대 유구와 유물들은 부여 궁남지 내부와 주변에서 많이 확인되었다. 부여 궁남지 북쪽 구역에는 동서 방향의 도로와 양 측구에 배수로의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이는 동일 방향의 수로, 동서 수로와 연결되는 남북 방향의 수로가 확인되며, 동서 수로 주변에서 초석건물지를 포함한 건물지, 부정형유구, 석렬유구 등이 집중 분포한다. 초석건물지는 주춧돌이 일부 남아 있으며, 나머지 건물지는 벽주건물지로 추정된다. 부여 궁남지 내부에서는 목조저수조와 그 주변을 지나가는 남북 방향의 수로가 확인되었다. 부여 궁남지 남쪽 구역에서는 비교적 고지대에서 건물지와 구상유구 등이 확인되었고, 저지대에서는 수로와 우물이 확인되었다. 우물은 석축된 것으로 평면 원형이며, 깊이가 5m 이상으로 깊은 편이다. 부여 궁남지 서쪽 구역은 가마터와 우물, 동쪽에는 수로와 수전면, 자연 호안이 일부 확인되었다. 부여 궁남지 동남쪽 구역에서는 유구와 유물이 거의 확인되지 않았다.

백제 시대 유구들은 모두 사비 시기로 층위와 유물, 유구 성격에 따라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보고되었다. 1기에는 높이 4~5m의 저지대에 수전경작면, 사람 발자국, 웅덩이, 도로유구, 목제저수조, 수로 등이 확인되는데, 도로 및 수로의 중심 연대가 540년대로 나와 사비 시기 전반으로 추정하였다. 2기에는 높 5~6m의 약간 더 높은 지점에 건물지, 구상유구, 가마터, 우물 등이 조성되었는데, 중국 화폐인 개원통보(開元通寶)[621] 등의 유물로 보아 더 늦은 시기로 추정하였다.

[출토 유물]

부여 궁남지는 청동기 시대 토층에서는 민무늬토기, 원삼국 시대의 유구와 유물포함층에서는 원저단경호, 이중구연호, 장란형토기, 완 등이 출토되었다. 백제 시대 유물은 사비 시기에 해당하는데 연화문수막새, 평기와, 전돌, 뚜껑접시, 삼족배, 대부완, 대부접시, 무대완, 깊은바리토기, 자배기, 시루, 대상파수부호, 직구호, 짧은목항아리, 병, 그릇받침, 토제연통 등의 토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목제 용기, 가래, 자귀, 빗, 망치, 갈자리, 방직기, 비경이 등 직조 관련 유물, 짚신, 목간, 철촉, 쇠 집게, 쇠손칼 등도 출토되었고, 중국 당나라 화폐인 개원통보도 출토되었다.

이때 부여 궁남지에서 출토된 서부 후항명 목간은 서부 후항에 사는 정(丁) 2인과 중구(中口) 4인, 소인(小口) 2인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매라성(邁羅城) 법리원(法理源)에 답(畓) 오형(五形)을 분급받아 경작하고 있다는 사실과 ‘귀인’, ‘부이’라 불린 외래계 출신으로서 기존의 백제민과 구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목간은 호적과 양안이 결합된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록과 실제 상황을 확인하고 대조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파악된다. 즉 필요 시에 열람할 수 있으며, 현실과의 합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대조의 기능을 가진 장부적 성격의 목간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목간은 백제 시대의 행정구역명, 인명, 지명에 관한 정보 및 수전을 개간하였던 사실이 적혀 있어 당시 사회상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자연 유물은 복숭아씨, 살구씨, 솔방울, 박씨 등의 씨앗류, 사슴, 돼지, 소, 말, 개 등의 동물뼈, 자라, 참돔, 잉어, 재첩 등의 어패류가 확인된다. 부여 궁남지 서쪽 구역에서 출토된 상자형전돌, 연화문수막새 등은 부여 군수리 사지에서 보이는 것들과 비슷하여 서쪽에 있는 부여 군수리 사지와 관련된 유물로 추정된다.

[현황]

부여 궁남지는 1965년부터 1967년에 부분적인 복원 공사가 실시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의의와 평가]

부여 궁남지 일대는 백제 사비 시기 수전, 수로, 건물지, 우물 등이 확인되고, 토기나 목기, 자연 유물도 많이 출토되어 당시 식생활, 의생활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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