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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조긍섭이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에 있는 공암(孔巖)을 소재로 쓴 한시. 「공암풍벽(孔巖楓壁)」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조긍섭(曺兢燮)[1873∼1933]이 청도의 공암을 소재로 하여 지은 한시이다. 운문의 승경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공암(孔巖)이다. 공암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인 운문면 공암리에 자리하고 있다. 높이 약 30m의 반월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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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학자와 문신 들이 청도를 지나가다 느낀 감흥을 읊은 한시. 「과도주(過道州)」는 조선 후기의 학자인 방산(舫山) 허훈(許薰)[1836∼1907]이 경상북도 청도군을 소재로 하여 지은 한시이다. 청도의 특정 지역에 대해 읊기보다는 청도를 지나가다가 느낀 감정을 읊은 것이다. 청도를 지나다가 느낀 감흥을 지은 시로는 조선 후기의 문인인 성현(成俔)[1439∼1504]의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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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이 청도 향교의 학도들에게 내린 한시. 「권시청도학자(勸示淸道學者)」는 조선 시대 문신이자 학자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1478∼1543]이 지은 한시이다.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각 지역 향교의 학도들을 권면하기 위해 지은 시 가운데, 청도의 학도들에게 내린 시이다. 칠언 절구로, 운자는 ‘심(心)’, ‘심(尋)’으로 구성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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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두암 이기옥이 운문산을 소재로 지은 한시. 이기옥(李璣玉)[1566∼1604]은 자신의 호를 운문의 두암(竇巖)[공암]에서 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운문산에 대한 애호가 남다른 인물이었다. 운문산과 관련해서 「노중억운문산(路中憶雲門山)」과 장편의 부(賦)가 전한다. 「노중억운문산(路中憶雲門山)」은 7언 절구이며 운자는 ‘청(淸)’과 ‘정(程)’이다. 「노중억운문산(路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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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이진상이 청도 출신인 박시묵의 부탁으로 지은 기문. 「대비동산정기(大庇洞山亭記)」는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1814∼1878]이 경상북도 청도에 후진 양성을 위해 정사를 지은 뒤 친구인 이진상(李震相)[1818년∼1886]에게 부탁하여 받은 기문이다. 이진상은 구한말에 활동한 유학자이자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대비동산정기」에서는 정사(精舍)의 창건 유래를 크게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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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박하징이 운문산성을 오르며 지은 한시. 박하징(1483∼1566)이 운문산과 관련하여 남긴 시는 「등운문산성(登雲門山城)」을 포함해 모두 4수이다. 선경에 노니는 한가로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1871년 『병재 문집』에 수록되었다. 「등운문산성」은 5언 율시이며, 운자는 ‘편(鞭)’, ‘견(鵑)’, ‘천(川)’, ‘연(筵)’이다. 건마유산객(騫馬遊山客)[느린 말로 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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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이원조 등이 청도 만화정 건립 때 지은 기문. 만화정은 청도 운강 고택의 부속 건물로, 1856년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1814∼1875]이 수학과 강론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만화정기」는 이원조(李源祚)[1792∼1872], 허전(許傳)[1797∼1886], 유주목(柳疇睦)[1813∼1872]이 만화정이 세워질 당시 지은 기문이다. 「만화정기」는 세 편 모두 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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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조정, 황응규 등이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산을 소재로 읊은 한시.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산을 읊은 한시는 청도의 인물은 물론이고 군수, 시인, 유람객 등 외지인들도 많이 지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여남방승기운문산(與南方僧期雲門山)」, 이만백(李萬白)[1657∼1717]의 「망운문산(望雲門山)」, 조정(趙靖)[1555∼1636]의 「유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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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김대유의 삼족대를 중수하고 김현호가 지은 상량문.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1479∼1551]는 청도를 대표하는 명현이다. 삼족대(三足臺)는 김대유가 벼슬에서 물러나 후진 양성을 위해 청도에 지은 건물이다. 「삼족당 중건 상량문」은 방손(傍孫)인 김현호(金顯祜)가 지은 것이다. 「삼족당 중건 상량문」은 두 편이 전하는데, 각각 1823년(순조 23)과 18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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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김종직이 김준손, 김기손 형제의 장원 급제를 축하하며 써 준 글. 1482년(성종 13) 대대로 청도에서 살던 김준손(金駿孫)과 김기손(金驥孫) 형제가 나란히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동생 김기손은 장원, 형인 김준손은 이등에 올랐다. 성종(成宗)[1457∼1494]은 김준손의 시권(試券)[시험 답안]을 보고서 첫째 등급인 갑과(甲科)로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 과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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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박상이 청도 관아에 묵으면서 지은 한시. 「숙도주」는 조선 전기에 활동한 문신인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이 청도 관아에 묵으면서 지은 한시이다. 「숙도주」는 7언 율시로, 운자는 ‘지(池)’, ‘지(枝)’, ‘유(帷)’, ‘리(離)’이다. 「숙도주」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관사고저수지의(官舍高低隨地宜)[관사의 높낮이는 땅의 형세를 따랐고]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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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학자인 곽진이 청도의 운문사를 추억하며 지은 한시. 「억운문사 차우인운(憶雲門寺 次友人韻)」을 지은 단곡(丹谷) 곽진(郭山晉)[1568∼1633]은 풍기 지역의 학자로, 시문에 능하였으며 장현광(張顯光)·이준(李埈)·정경세(鄭經世) 등과 사우 관계를 맺었다. 「억운문사 차우인운」은 곽진이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자리한 운문사(雲門寺)를 유람하였을 때의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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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청도의 사족(士族) 소요당 박하담이 운문천 일대에 구곡원림을 경영하면서 지은 시.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1479∼1560]은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의 선암 위에 소요당을 짓고 은거하며 많은 작품을 남긴 조선 전기의 문인이다. 박하담의 대표작인 「운문구곡가」는 1536년에 지은 작품이다. 「운문구곡가」는 『소요당집(逍遙堂集』) 제1권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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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청도의 운문사를 소재로 지은 한시. 조선 시대 청도의 사족들과 외지인들은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소재하는 운문사와 관련된 시를 상당히 많이 지었다. 군지와 문집 총간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권응인(權應仁)[1517∼?], 황응규(黃應奎)[1518∼1598], 손처눌(孫處訥)[1553∼1634], 곽진(郭山晉)[1568∼1633], 구치용(具致用)[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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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박하담이 청도의 운문산을 유람하고 남긴 부(賦).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1479∼1560]은 43세(1521) 때 지금의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소요당을 짓고 은거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운문산(雲門山)과 관련된 작품으로는 「운문산부」 이외에도 「운문구곡가(雲門九曲歌)」, 「운동잡영(雲洞雜詠)」, 「산행부(山行賦)」, 「눌연부(訥淵賦)」 등이 있다. 「운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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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경상북도 청도의 재지 사족인 이기옥이 운문산을 유람하고 남긴 부(賦). 이기옥(李璣玉)[1566∼1604]은 「운문산부(雲門山賦)」 외에도 「영춘남곡기(永春南谷記)」, 「유예안청량산록(遊禮安淸凉山錄)」, 「유강릉오대산록(遊江陵五臺山錄)」 등을 남기는 등 다분히 산수 취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운문산부」는 청도의 재지 사족인 이기옥이 운문산을 직접 유람하고 남긴 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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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2년 이중경(李重慶)이 청도의 운문산을 유람하고 쓴 기행문. 조선 시대 선비에게 있어 산수 유람은 인지지락(仁智之樂)의 추구라는 학문의 한 방편이었다. 따라서 산수에 대한 미의식을 유산기(遊山記)를 통하여 드러내고는 하였다. 유산기는 조선 후기에 대량으로 저술되었는데, 영남 지역의 사림이 주된 담당층이었다. 운문산과 관련된 유산기는 현재 5편이 전한다. 밀양 출신 오한(聱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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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이광정이 청도 자계 서원의 사액을 요청한 상소. 「자계 서원 청액소」는 조선 후기 유생인 이광정(李光鼎)[1636∼1694]이 지금의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 위치한 자계 서원의 사액을 요청한 상소문이다. 이 외에도 자계 서원과 관련한 시문으로는 정구(鄭逑)가 지은 「자천 서원 삼현사 봉안문(紫川 書院 三賢祠 奉安文)」, 「자천 서원 삼현향사 축문(紫川 書院 三賢享祀 祝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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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적천사를 소재로 지은 한시. 청도의 대표적인 사찰인 적천사(磧川寺)를 소재로 지은 한시로는 고려 후기 승려인 인각(麟角)의 「적천사(磧川寺)」와 조태억(趙泰億)[1675∼1728]의 「증적천사보신상인(贈磧川寺普信上人)」과 「우증보신사(又贈普信師)」, 홍한주(洪翰周)[1798∼1868]의 「유적천사(遊磧川寺)」, 신유한(申維翰)[1681∼?]의 「적천사과방장영선사(磧川寺過方丈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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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와 조선 시대 청도읍성 청덕루를 소재로 지은 한시들. 「제청덕루」는 청도읍성 내에 있는 청덕루에 올라 그 감회를 읊은 한시이다. 청덕루(淸德樓)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시대 지군(知郡) 최안을(崔安乙)이 세우고, 최원우(崔元祐)가 기문(記文)을 지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문신 이중경[李重慶]이 편집한 『오산지』에 의하면 청덕루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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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6년 청도 향교를 중수한 뒤 김일손이 쓴 기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1486년(성종 17)에 청도군학(淸道郡學)으로 있었다. 당시 청도 군수이던 이균(李鈞)이 김일손의 문학이 고명하고 언행이 엄정함을 알고 여러 생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학사(學師)로 초빙하였다. 1486년 5월에 향교가 중수됨에 이균이 요청하여 김일손이 중수기를 썼다. 「중수청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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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청도의 객관인 도주관의 건립 때 지은 기문. 「청도 객관 중수기」는 조선 시대에 청도의 객관인 도주관을 건립할 당시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지은 기문이다. 객관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각 고을에 지어 놓은 관사이다. 청도 객관인 도주관(道州館)과 관련해서는 「청도 객관 중수기」와 이건(移建) 상량문(上樑文)이 남아 있어 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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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성현과 조희일이 청도를 지나가다 느낀 감흥을 읊은 한시.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성현(成俔)[1439∼1504]과 조희일(趙希逸)[1575∼1638]이 지은 「청도 도중(淸道 途中)」은 청도를 지나다가 느낀 감정을 읊은 한시이다. 성현의 「청도 도중」은 7언 절구로 구성되어 있고, 조희일의 「청도 도중」은 5언 절구로 구성되어 있다. 성현의 「청도 도중」은 다음과 같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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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홍한주가 청도 동헌의 하소정을 소재로 지은 한시. 「청도군 하소정」의 부제인 ‘갑신춘 걸가래근 유월여편환 정성적재시시 임귀서게이률(甲申春, 乞暇來覲 留月餘便還 亭成適在是時 臨歸書揭二律)에서 알 수 있듯이 홍한주(洪翰周)[1798∼1868]는 부친인 홍직모(洪稷謨)[1770∼1834]가 청도 군수로 재직[1882∼1824]할 당시 청도를 방문하여 한 달 정도 머물다 돌아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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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년 청도의 진사 박란이 향로당(鄕老堂)의 건립을 기념하여 지은 기문. 향로당은 조선 전기에 악질 향리(鄕吏)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기 위해 지방의 품관(品官)들이 조직한 자치 기구이다. 유향소(留鄕所)·향사당(鄕社堂)·풍헌당(風憲堂)·집헌당(執憲堂)·유향청(留鄕廳)·향소청(鄕所廳)·향당(鄕堂) 등으로도 불린다. 향로당은 재지 사족층이 유교적 행사인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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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경상북도 청도 출신의 유학자인 이진상이 박성원의 호에 대해 풀이한 글. 「후산설(後山說)」은 구한말 경상북도 청도 출신의 유학자인 이진상(李震相)[1818∼1886]이 벗 박성원(朴聖源)의 호를 풀이하여 준 글이다. 퇴계학의 맥을 계승한 구한말 영남의 대학자인 이진상의 학문적 깊이를 살펴볼 수 있는 글이다. ‘후산(後山)’이라는 호의 의미를 밝힌 「후산설」은 크게 세 단락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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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청도 운문사에서 발견된 임춘의 문집. 임춘(林椿)의 『서하집(西河集)』은 조선 숙종 때에 중간되었으나 초간본이 인멸되어 전하지 않았다. 그러다 1656년에 청도 운문사(雲門寺)의 승려 인담(印淡)이 꿈에 한 도사를 만나 그 도움으로 동탑(銅塔)에서 다시 찾아내었다고 한다. 또한 원래의 소장자는 담인(淡印)이었고, 후에 다시 발견한 자는 인담이었다는 점이 기이하다고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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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청도 출신의 문인·학자. 김용희는 청도 지역의 유림으로서,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때 어려운 조국의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숭조 사업을 벌여 자계 서원을 중건하고 청계 서원을 창건했으며, 구휼 사업을 펼쳐 의장(義庄)을 설치하여 가난에 시달리는 친인척과 이웃을 도왔다. 또 학문적 노력도 기울여 『성리대전(性理大全)』·『입학도설(入學圖說)』·『역대기년(歷代紀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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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청도 출신의 문신. 김일손은 청도 출신 중에서 후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중 하나이다. 1498년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해 사형을 당하였다. 김일손의 죽음은 김해 김씨 일족뿐만 아니라 지역 인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청도 지역에 16세기 이후 은거의 풍토가 유행하는 직접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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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청도 출신의 문인. 김재화는 영남 유학자들의 일반적인 면모와는 달리 문인으로서도 명성이 상당히 높았다. 김재화는 당시 영남 일대에서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심재 조긍섭(曺兢燮)[1873∼1933]의 제자로, 창강 김택영(金澤榮)[1850∼1927]·경재 이건승(李建昇)[1858∼1924] 등 기호 지방의 문인들과도 문장에 대해 활발한 논의를 펼쳤다. 본관은 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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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청도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김치삼은 탁영 김일손의 증손으로, 광해군 즉위 후 역모 혐의를 받은 임해군(臨海君)이 죽자 벼슬을 버리고 운문산 아래 도연(道淵) 가에 정자를 짓고 두문불출하며 경사(經史)에 전념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일지(一之)이며, 호는 도연(道淵)·인촌거사(仁邨居士). 증조할아버지는 탁영 김일손이며, 할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김대장(金大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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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경상북도 청도 출신의 학자.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인암(忍庵). 아버지인 밀직 부사 자초(紫樵) 박정곤(朴珽坤)과 의흥 예씨 예대주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후기 영남 지역에서 노론 세력을 영도한 경양재(景陽齋) 박태고(朴太古)와 죽옹(竹翁) 박중채(朴重采)가 8대조와 7대조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대로 기호 학맥을 계승한 집안이다. 박효수(朴孝秀)[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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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청도 출신의 승려. 선탄은 청도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의미의 ‘오산 삼걸(鰲山三傑)’ 가운데 한 명이자,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시승(詩僧)이다. 승려의 신분보다는 오히려 시인, 곧 시승으로서 자기 존재를 역사에 남겼다. 사찬 군지인 『오산지(鰲山誌)』에는 선탄이 경상북도 청도군 출신으로 대성리(大城里)에서 태어났으며, 한때 청도군의 적천사(磧川寺)에서 주지로 머물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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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청도 출신의 학자. 예대희는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어버리자 1912년 식솔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이승희·맹보순과 함께 국권 회복 방안을 논의했고, 이승희와 함께 공교회 운동에 참여하여 한인 공교회 지회를 설치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본관은 의흥(義興), 자는 국언(國彦), 호는 소남(小南)·희재(希齋)·이산(伊山). 증조할아버지인 예지열(芮之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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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청도 출신의 문인. 이기옥은 임진왜란 전후 시기 청도 산수 문학의 대표 작가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청도 지역의 재지 사족들은 앞선 시대와 마찬가지로 벼슬하기보다는 은거가 주류를 이룬다. 이들은 벼슬보다 산수를 벗삼아 시와 문장 짓는 것을 더 즐겼다. 이러한 청도 산수 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두암 이기옥과 두암의 아들 수헌 이중경이 있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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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청도 출신의 문인. 이중경은 17세기 청도 지역에서 학덕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재지 사족 가운데 한 명이다. 이중경은 800편이 넘는 시(詩)와 산수 유기 「유운문산록(遊雲門山錄)」, 그리고 연작 시조 「오대어부가(梧臺漁父歌)」, 청도 지역 최초의 사찬 군지 『오산지(鰲山誌)』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숙(慶叔), 호는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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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청도 출신의 학자.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덕소(德邵), 호는 눌연(訥淵). 할아버지 정세경(丁世卿) 때 청도에 처음 거주하였다. 아버지 정복(丁復)과 어머니 월성 이씨(月城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민도(丁敏道)[1553∼1635]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운문의 눌연(訥淵)에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을 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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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청도의 검(劍)의 명장(名匠). 탄재(炭齋)는 경상북도 청도군에 살던 검을 만드는 장인이다. 성은 신(申)이고,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아 탄재라는 호로 불렸다. 조선 후기에는 청도군에서 생산된 보검(寶劍)과 보도(寶刀)를 으뜸으로 쳤는데, 이는 탄재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룩된 성과임이 여러 문헌에 전한다. 미천한 신분이라 가계는 알 수 없다. 성은 신(申)이고,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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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부터 청도 지역에 기반을 둔 토착 성씨. 1432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청도의 토착 성씨로 김(金)·백(白)·(申)·이(李)·조(曺)씨가, 내성(來姓)은 최(崔)·손(孫) 등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다. 청도의 사찬 군읍지인 『오산지(鰲山誌)』는 최씨와 손씨도 토성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앞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