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382 |
---|---|
한자 | 統一新羅時代 |
영어공식명칭 | Unified Silla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남석 |
[정의]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900년 후백제가 들어서기 전까지 통일신라 시기의 충청남도 당진의 역사.
[개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면서 전제 왕권을 크게 강화하는 한편, 중앙 집권 체제로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중앙의 정치 체제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관료 기구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부 시중의 지위를 높였고, 그 아래에는 위화부를 비롯한 13부를 두고 행정 업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왕권 강화는 유학의 장려로 나타났고, 국립 대학을 설치하여 유학적 통치이념을 강조했다.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했다. 군사·행정상의 요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군사적 기능보다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아래에는 군이나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했다. 그 아래의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9주는 685년(신문왕 5)에 설치되었다. 삼국 균등의 한 방법으로 신라의 본토에 3개 주를 두었고, 고구려 구토에 3개 주, 백제 구토에 3개 주를 설치하였다. 그 후 757년(경덕왕 16)에 이르러 다시 개편하였는데 상주·양주·강주·한주·삭주·웅주·명주·전주·무주 등이었다. 이 중에서 웅주는 충청도 지역을 관할하였으며 이때 당진 지역은 웅주에 속했다. 웅주[웅천주]는 5소경의 하나인 서원경과 13개 군, 29개현으로 편성되었고 당진은 벌수지현(伐首只縣)에서 당진현(唐津縣)으로, 신평(新平)은 사평현(沙平縣)에서 신평현(新平縣)으로, 여촌현(餘村縣)이 여읍현(餘邑縣)으로, 면천(沔川)은 혜군(槥郡)에서 혜성군(槥城郡)으로 개칭되었다.
이들 지역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군(郡)에는 장관으로 군태수(郡太守), 현(縣)에는 그 격에 따라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임명되었다. 주·군·현 밑에는 촌(村)이라는 작은 행정 구역이 설정되어 있었다. 이 행정촌은 몇 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었으며 촌주(村主)가 관할하였다. 촌주는 그 지방의 토착 세력가로 임명하였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통제를 받았다. 토착 세력가 출신으로 주·군·현의 말단 행정 보좌직으로 리(吏)가 있었다. 그리고 주·군·현 밑에는 향·부곡이 있었는데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일반 촌민보다 약화된 신분층이었다.
[당진 명칭 등장]
757년(경덕왕 16)에 와서 벌수지현(伐首只縣)이라는 명칭은 당진현(唐津縣)으로 바뀌었다.
당진 지역의 대표적인 항구로는 당진포(唐津浦)와 대진(大津)[한진]을 들 수 있다. 당진포는 현재 당진시 고대면 당진포리에 있던 포구이며, 대진[한진]은 당진시 송악읍 한진리 포구다. 이들은 당과 교역하는 문호로 개방되어 당나라의 문화가 이곳을 통해 남행(南行)하는 길목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당진시 고대면 진관리에 관동(館洞) 마을이 있는데, 진관리의 지명 유래도 당나라로 가는 나룻길[津]이 있고, 공인(公人)을 도와주는 관(館)이 있어 ‘진관(眞館)’이라 불렸다.
적당한 해로의 발달은 당의 선진 문화 유입을 가져왔고 어업의 발달은 당진군내에 형성된 포구를 활성화시켰다. 당진 지역은 당의 선진 문화가 상륙함에 따라 흥성한 항구도시로 성장하게 되었고 대당 전진 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의 부족으로 상세한 해명은 어려우나, 당진 지역에 산재한 많은 사지와 당진포를 중심으로 축성된 산성은 당진의 흥성함을 입증하는 하나의 사례로 여겨진다.
[유적 현황]
통일 신라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지로는 당진시 면천면 삼웅리 나무 고개 유적이 주목된다. 충청 문화재 연구원이 2005년에 발굴한 나무 고개 유적에서는 주초식 건물지 3동과 우물지 1기, 폐와층 1개 층, 돌널무덤[석관묘] 6기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중 당나라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과대(銙帶)는 매우 주목된다. 과대는 관직을 소유한 인물의 상징물로 이곳에 거주한 지방관이나 호족의 존재를 반영한다. 이것은 면천 지역에 유력한 세력가가 있었다는 의미이고, 당시의 혜성군이 매우 유력한 지방 도시였음을 알려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