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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주 최초의 전문 연극 단체. 탐라의 얼을 계승·발전시키고, 탐라인의 문화 의식 향상에 기여하는 데 있다. 1975년 3월에 창립한 제주 최초의 아마추어 극회인 제주YMCA 가람극회(원명: 제주YMCA 대학생 극예술 연구회)에서 활동하던 회원들인 박순남, 이경수, 강달윤, 김영철, 이광후, 조희란 등이 중심이 되어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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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 김몽규를 기리는 비. 김몽규 제주목사 겸 방어사는 1752년(영조 28) 12월에 제주도에 부임하고 1754년(영조 30) 10월에 파면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삼읍성문(三邑城門) 바깥에 옹중석(翁仲石) 일명 우형석(偶形石)을 새로 세웠으며, 운주당(運籌堂), 관덕정(觀德亭), 읍진창(邑賑倉), 동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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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동마다 청년회 및 바르게 살기운동협의회, 마을 운영회 등이 있지만 예전에는 그런 모임이나 조직들이 활성화되어 있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김성원은 몇 개의 조직과 친목에 참여하고 있는데, 바르게 살기운동협의회와 서사라 마을회를 비롯해 갑장 친목, 이웃 동네 친목 등에 참여하고 있다. 이 중 서사라 마을회는 모여서 마을 청소도 하고 방범도 선다고 한다. 그 외 서문시장 상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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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집을 뒤로 하고 새로운 시장 건물 2층에 자리한 상인회 사무실을 찾았다. 그곳에서 김성원 상인회 회장을 만났다. 시장 상인들을 만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상인들이 ‘그렇게 서문시장에 대해서 듣고 싶으면 상인회 회장을 만나보라’고 권유를 했다. 마침 그때 지역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 작가도 서문시장에 대한 이야기라면 김성원을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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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이 어렸을 때 사람들이 노동복으로 즐겨 입던 옷은 ‘갈중이’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노동복도 다양해졌지만, 예전에 제주 사람들은 입는 것에 그리 녹록치 않았다고 한다. 이 ‘갈중이’는 아직 익지 않은 감을 따서 빚은 다음 즙을 짜서 광목천에 들여 옷을 만든 것으로 파란 감물은 말릴수록 어두운 갈색으로 변하는데, 감이 갖고 있는 성분 때문인지, 땀을 자주 식혀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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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이 27살 때(1967년) 누이동생이 인근 편물점에 편물 기술자로 있는 현재의 부인(당시 22살)을 소개시켜 주어 혼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인은 당시 용담동 인근의 편물점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김성원이 혼인할 당시 남자 나이 스물일곱은 혼례 치르기에 다소 늦은 나이였다. 친구들은 거의 장가를 간 때였다고 한다. 스물다섯만 되면 부모들이 장가를 보내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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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은 오현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일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제주 시내에는 신통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육지로 일자리를 찾아 출도했다고 한다. 작은 형도 서울로 이사를 했는데, 1960년대에는 제주에서 취업하기 어려운 경우, 육지로 취업하기 위해 출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제주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학교를 중퇴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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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음력 4월 28일 한림에서 7남매중 3남으로 태어남. 1954년경 제주 오현중학교를 다니기 위해 제주시 용담1동 누나의 집으로 이사 옴 1958년경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취업하기 위해 상경함. 1967년 27세 때 부인 대정읍 모슬포 출신 양애향(1946년 음력 6월 15일생)과 혼인을 함. 1969년 장녀 김영희가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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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 우측의 큰 길을 건너오면 제주향교 지경에 도달하게 되는데, 제주향교에는 재미있는 풍수지리가 전한다. 용담동 노인회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예전에는 향교 터가 좋아야 출세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 향교 자리는 어느 자리보다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제주향교도 향교 터를 여러 번 옮기면서 선비를 출세시키려 했었다는 것이다. 특히 향교 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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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말기 제주목사 백낙연(白樂淵)을 기리는 비. 백낙연은 무신이며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77년(고종 14) 정월에 부임하고, 1881년(고종 18) 5월에 교체되었다. 흉년이 들자 조정에 요청하여 백성들을 진휼하였고 동쪽과 남쪽의 두 성문 앞의 큰 길을 수리하였다. 백낙연이 부임하던 1877년에 제주도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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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에는 다른 마을에는 있는 산이나 오름이 없이 대개 평탄한 지형을 이루면서도 드물게 병문천과 한천이라는 두 개의 큰 하천을 끼고 있어 물과 관련된 지명이나 이야기가 많다. 병문천은 한라산에서 발원하여 아라1동, 도남동 서쪽, 오라1동과 2동, 이도2동, 그리고 삼도1동과 용담1동과의 경계를 이루면서 바다와 만나는 건천이다. 『증보탐라지』에는 ‘제주읍 용담리에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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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마을. 지형이 달과 비슷한 형국 또는 달이 뜨는 모습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과 또는 달이 뜨는 모습이 잘 보일 만큼 높은 지대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주향교 북쪽에 동~서로 난 옛날의 구 한질을 이르는 동네로서 제주성의 서문 밖에 부러릿질 서쪽 길가와 개물동산 남쪽의 비석거리를 말한다. 또는, 동북쪽 방향의 골목길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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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 인근 사람들에게 용담1동에서 반드시 가보아야 할 곳을 물어보면 향교와 용연 그리고 서문시장을 꼽았다. 이 곳 중에서 사람냄새 나는 서문시장은 어떨까 싶어 발길을 돌렸다. 시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현대화’라는 명목 아래 시장은 일목요연한 형태로 정리가 되어있었고, 새롭게 지어진 시장 건물과 기존 상가들이 어우러져 판을 벌이고 있었다. 새롭게 지어진 시장 건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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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상설시장. 서문공설시장은 제주시의 구도심권에 속해 있지만 지형적 조건이 동문공설시장과는 달리 협소하고 계속되는 제주시 도심 인구의 유출로 인해 성장 잠재력에도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최근 경기 침체와 시설 노후·교통 불편·대형 할인 매장의 등장으로 그 기능과 규모가 현저히 축소되고 있다. 서문공설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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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성균관의 이념과 목적을 실천하는 유교 단체인 성균관유도회의 제주 지부. 성균관유도회 총본부는 1945년 한국의 유림 대표들이 성균관에 모여 결성한 유림 단체로, 초대 위원장에는 김창숙(金昌淑)을 추대하고 부위원장에 김성규(金成圭)·이기원(李基元), 감찰위원장에 이재억(李載億)을 추대하였다. 성균관유도회에서는 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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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흑백사진을 주로 촬영하며 활동하고 있는 사진 단체. 송동효사진공방은 제주의 자연 환경과 전통 문화 등을 담아내 후세대들에게 문화를 전승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흑백사진의 영상을 통해 자동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에서 가마소의 도자기를 다루는 장인정신으로 예술매체의 다양성을 살리고 사진예술 미학을 도모하고 있다. 1994년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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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음력 10월 11일 제주시 용담1동 비룡로 동네에서 부친 신창준과 모친 김한선 사이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남. 1932년 10살 어머니와 함께 큰 오빠가 살고 있는 일본으로 도일함. 1932-42년 재일 제주인들과 함께 우산 공장에서 일함. 1941년 19살 제주시 래물 출신 남편 고순언과 일본에서 중매로 혼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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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의 마을 변화는 급격히 일어나, 도시환경의 변화 못지않게 이동 인구도 많아져 이곳에서 용담1동 토박이를 찾아 옛 이야기를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오래 살았다는 사람들이 대체로 30년 안팎이었다. 고작해야 1970년대 이후 이야기나 듣게 되는 셈인데, 대부분 책자를 통해 습득한 용연 이야기나 제주향교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다 용담1동에 전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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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년의 집을 들어서면 안채와 바깥채가 마주보고 서 있고, 마당은 텃밭으로 일궈지고 있었다. 집의 기본 골격을 보자니 꽤 오래 전에 지어진 집이란 생각이 들었다. 신옥년의 말에 따르니 1백년이 넘은 집이라고 한다. 듣기로는 조부 때부터 살다가 조부 사망 후 부친에게 상속된 집이라고 한다. 부친은 목수여서 곧잘 문살이라든가 좋은 재료로 집을 보수했었는데, 지금은 신옥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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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년은 10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13년을 일본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혼인을 했다. 시댁은 래물이라 불리는 제주시의 사수동 지역이었지만 시댁 식구들이 일본에 살고 있던 같은 교포였다. 큰오빠의 올케가 래물 출신으로 시댁은 올케의 집과 앞, 뒷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댁 쪽에서 올케에게 신옥년이 ‘얌전해 보인다’고 중매를 부탁해서 열아홉에 혼인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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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년이 일본으로 처음 간 것은 열 살 때였다. 그리고 13년을 살다 귀국했다. 부모와 작은오빠는 모두 용담1동에 살고 있었지만 큰오빠와 고모네, 작은아버지 딸과 아들네가 일본에 살고 있어서 모친이 ‘석달 증명’(30일용 비자로 이해됨)을 하여 어머니와 일본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제주와 일본을 왕래하던 배는 군대환, 복목환, 경성환, 신길환 등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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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년이 해방 후 귀국한 지 얼마 안돼서 4·3을 맞았다. 1947년 3·1절 행사로 시작된 4·3을 그는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직접 죽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차 대전 때에 미국이 일본을 습격할 때도 폭탄으로 습격했기 때문에 직접 사람을 죽이는 모습보다는 판자집들이 불타는 영상이 오히려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4·3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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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년과의 이야기는 용담동 옛 지경들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신옥년의 기억을 빌리자면 해방 후까지 용담동에는 집들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간간히 한천까지 이어지는 길가에 상점들만이 있었다고 한다. 현 서문시장 인근에도 집이 거의 없었고, 서문시장 위로는 거의 소나무밭이었는데, 시신을 묻는 묘지들이 그곳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한두기 근처나 부러리 근처 서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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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어사 심동신의 선정비. 심동신이 1859년(철종 10) 11월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제주목사 정우현(鄭愚鉉)을 뇌물죄로 파직시키고, 1860년(철종 11) 도민의 시전(柴錢) 4백 냥을 감면해 주었다. 또한 제주성의 효자 김광숙(金光淑), 오라리의 양일복(梁日福)의 처 열녀 김씨, 매촌(梅村)의 변지환(邊之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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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방어사 심영석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심영석 이건향교비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1826년 제주방어사로 부임했던 심영석이 당시 광양에 있던 향교를 현재의 향교 자리로 옮기기 위해 노력한 공을 치하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제주에는 심영석 이건향교비 외에 ‘심영석 청덕선정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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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말기 제주목사 심원택의 흥학비. 심원택은 무신이며,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86년(고종 23) 5월에 제주도에 부임하였고 1888년(고종 25) 7월에 교체되었다. 남수구(南水口) 홍예(虹霓)를 개축한 공로를 기려 비가 세워졌다. 비신의 너비는 39.5㎝이고 두께는 14㎝, 높이는 87.5㎝이다. 비 앞쪽에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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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국제공항에서 20여 분을 승용차로 달려 제주시의 시내 중심가로 진입하려는 길목에 용담동이 있다. 용담동은 현재 전체 세 개의 동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제주국제공항에서 제주 시내로 가는 동안 용담3동, 용담2동, 용담1동을 거치게 된다. 제주 시내 중심가라 일컬어지는 ‘중앙로’와 가장 가까이 인접한 곳이 용담1동이다. 용담1동은 다른 동과 달리 오름이나 산이 없이 평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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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나 전설들이 어느 정도 서사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도채비와 관련된 이야기는 민중적인 금기 사항을 드러낸다. 용담에도 그런 전설들이 남아 있었는데, 『용담동지(용담동지편찬위원회, 2001)』에 보니 도채비와 관련된 전설이 남아 있었다. ‘어느 날 밤 한 시경, 서문다리(병문교) 위쪽에 사는 한 사람이 술에 얼큰히 취해 집으로 가던 도중 집 앞 고목나무 아래 내(하천) 바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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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 395번지 용화사 절에는 제주도 민속자료 제1호(1971년 8월 26일 지정)인 복신미륵상이 있다. 제작 연대는 확실치 않았으나 마을 사람들은 고려시대로 추정했으며, 이곳에서는 자복, 자복신, 자복미륵, 미륵불, 서미륵, 서자복, 미륵부처, 큰 어른, 석불 등으로 부르고 있었다. 원래는 해륜사지라는 절터에 있었는데, 숙종 때 불교 타파 정책으로 절이 없어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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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용연과 기우제에 관한 설화 외에 김성원에게서 비룡못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는데, 김성원이 어릴 적 이 ‘비룡못’에서 여름이면 목욕도 하고 물놀이를 하던 아련한 기억이 깃든 까닭에 전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비룡못과 관련해서는 여러 전설이 있다고는 하는데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하나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용담동지편찬위원회가 2001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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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탐라 후기의 제사 유적. 용담동 제사 유적은 제주시 앞 해안가에서 한 단 올라온 표고 20m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날씨가 좋을 때면 관탈도·추자도·해남 반도의 여러 섬 끝머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옛 제주읍성의 서쪽으로 흐르는 한천과 병문천 하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드넓은 ‘동한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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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한두기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당. 제주 지역의 신당은 흔히 본향당, 일뤠당, 여드레당, 해신당으로 나누는데, 그 중 본향당은 마을 공동체의 신을 모시는 성소로 마을굿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본향당 당신은 마을 공동체의 신인만큼 마을 사람 전체의 생명과 건강, 사업 번창 등 모든 부분을 관장한다. 본래는 모든 자연마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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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끼고 있는 만큼 용담1동의 어업 활동도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용담동 사람들은 한두기 포구와 다끄내 포구를 이용해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를 했다고 한다. 김성원에 의하면 한두기 어부들은 제주의 다른 지역과 달리 농사와 뱃일을 겸업하지 않았다고 한다. 해녀들도 있었는데, 용두암 근처에서 물질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물질을 했던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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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은 용담동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용담1동, 2동 구분을 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1동에 살던지 2동에 살던지 간에 모두 용담동 사람들이라는 한묶음으로 그들을 엮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인 즉 오히려 행정적 구분을 짓고 인구수를 동별로 추정하는 것은 일련의 식자층들이란다. 실제로 제주시 주민들은 모두 용담을 하나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용담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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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의 김성원과 신옥년의 말에 의하면 1950년대까지 용담동의 생업은 주로 농업과 어업이었다고 한다. 서사라 근방이 전부 밭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 곳 사람들은 조, 보리, 콩, 팥, 농사를 많이 지었다고 한다. 이 중에 조, 보리가 대중이었고, ‘지슬’이라 불리는 감자 농사도 조금 지었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경작은 식량을 위한 것이어서 상품 작물인 유채농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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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과에 급제한 제주도 사람들의 이름을 연대순으로 수록한 인명록. 1892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용방록(龍榜錄)』은 1414년에 급제한 고득종으로부터 1863년에 급제한 한석윤까지 총 56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용방은 『매천야록(梅泉野錄)』 갑우이전조(甲牛以前條)에 “문과를 용방, 무과를 호방, 소과를 연방, 대과를 주방이라 한다.”고 한 것처럼 문과를 달리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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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에서 가장 유명한 설화 중의 하나가 기우제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기우제와 관련된 설화만도 여러 개의 버전이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가뭄이 들 때 용연에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것이었다. 물이 많은 동네인 만큼 물에 관련된 설화도 많고, 그 버전도 많았다. 다행히 노인회 사람들의 소개로 몇 권의 책을 통해 문자로 정리되어 있는 설화를 접할 수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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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의 끝자락, 바다와 만나는 곳에서 용연을 만난다. 용연은 용두암에서는 약 200m 떨어진 한천 하류에 있는 맑은 못이다. 예부터 용궁의 사자들이 백록담으로 통하는 길이었다는 이 용연은 한라산 정상 백록담 북쪽에서 발원하여 오등동, 오라동을 거쳐 용담동의 동서한두기 사이의 바다와 이어지는 한천 하류로 전형적인 건천이지만, 사철 용천수가 풍부하고 만조시에는 해수가 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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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용연 계곡에서 개최되는 문화예술 행사. 용연은 용이 산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예로부터 가뭄이 극심할 때 기우제를 지낸 신성한 곳이기도 하며, 신제주·구제주 목사와 판관이 교체되는 송구영신의 잔치를 즐긴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음력 7월 기망일(旣望日) 달빛이 교교하게 용연을 비추면 옛 선비들은 용연에 배를 띄워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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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 이행교를 기리는 비. 이행교는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1827년(순조 27) 8월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제주에서 3년 정도 있으면서 이행교는 전임자인 심영석이 추진하던 제주향교 이전을 마무리 짓고 대일관과 홍화각 등을 중수하여 제주 지역의 사학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또한 판관 이의겸이 여색을 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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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 장인식을 기리는 비. 장인식은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48년(헌종14) 3월에 부임하고 1850년(철종 1) 6월에 사직하였다. 양몽재(養蒙齋)를 세워서 서책을 마련해 두었고, 문과초시(文科初試)를 설행하였다. 금종각(金鍾閣)을 갖추고 군기를 보충하여 갖추었으며 새로 서원의 산앙문(山仰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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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과 제주향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용담동의 자연마을은 일제시대에 접어들어서는 급격한 변화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용담동은 1940년대까지는 자연마을인 용두동, 새광양, 정평동, 수근동 등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제주목의 성외(城外)에 있는 다소 격리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2년 일제가 군용비행장 건설로 현 제주국제공항 부근에 ‘정뜨르(당시 정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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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제주 향교에 부설되어 있던 민립 교육 기관. 제주 향교의 유림은 20세기 초 급속한 변화 속에서 향교의 한문 교육으로 현실에 대처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숙의 끝에 제주 향교 부설 사립 제주 대동 보통학교를 개교하였다. 1910년 12월에 첫 졸업식을 거행한 이후 제주 공립 보통학교의 운영이 원활하게 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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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사립 중학교.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 기본이 바로 선 학교’라는 교육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교훈은 ‘명륜(明倫), 창조(創造), 건강(健康)’이다. 전통적 교육의 전당인 제주 향교에서 출발하여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1일 제주 중학원으로 개설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 12월 1일 제주 초급 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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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여성 단체. 제주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연대를 통한 성 평등 사회를 실현하는 데 목적이 있다. 1987년 11월 29일 창립한 제주여민회는 1995년에 부설로 여성상담소를 개설했다. 1997년 5월 13일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인가됐으며, 1998년 1월 1일 24시간 여성 긴급 전화 ‘여성 1366’을 개통하였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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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청년 민간 단체. 청년회의소는 20세에서 40세까지의 청·장년을 회원으로 하여 구성된 사회 단체이다. 청년회의소는 1915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청년 시민 클럽으로 시작된 뒤, 1946년 파나마에서 열린 국제청년회의소 세계대회에서 공식 설립되었다. 국제청년회의소는 1950년 총회에서 지도자 훈련을 기초로 한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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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지역 인터넷 신문. 인터넷 이용이 보편화되고 확산되면서 전통적인 언론의 개념과 기능, 역할에 변화를 가져왔다. 인터넷 언론은 새로운 형태의 언론으로 등장하여 뉴스의 생산이나 유통 등 언론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기존 매체와 다른 방식을 보였다. 큰 자본의 투자 없이 웹페이지를 통해 언론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인터넷 신문은 편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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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음악 단체. 제주팝스오케스트라는 제주도민의 정서 함양과 다양한 문화 예술 향유의 기회를 확대하고 도내 대학에서 배출되는 음악 전문 인력 수용의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국제관광도시로서의 문화관광을 실현하기 위해 창단되었다. 2000년에 창단된 제주심포닉밴드가 2004년 1월 단원의 확충과 장르의 다양화를 목표로 제주팝스앙상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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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시대 지방 관립 학교. 제주향교는 1392년(태조 원년) 현유의 위패를 봉안·배향하고, 제주민을 교화·교육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았고, 교수관 1명이 정원 70명의 교생을 가르쳤다.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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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 제주향교 입구에 있는 표지석. 하마비는 본래 1413년(태종 13) 종묘와 궐문 앞에 세운 것이 우리 나라의 시초라고 한다. 그 후 문묘와 지방 관부 등에도 이 하마비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하마비 앞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제주향교 하마비는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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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조희순(趙羲純)의 향교 중수를 기리는 비. 조희순은 무신이며,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1868년(고종 5) 10월에 부임하였다가 1872년(고종 9) 5월에 교체되었다. 조정에 요청하여 진휼(賑恤)을 베풀었고 군기의 보수, 남북 수구의 홍예(虹霓)를 수치(修治)하였으며, 성상(城上)에 격대(擊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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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이후 지속적인 도로 확장과 병문천, 한천의 복개 공사로 용담1동의 지리적 변화는 급격했지만, 최근에는 일도 지구나, 연동 지구에 새로운 시가지들이 형성되면서 용담1동은 50년대에서 80년대 누렸던 호황은 가라앉고 한적한 분위기 속에 도심의 관문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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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해방 후 해외 동포들의 귀국과 한국전쟁으로 피난민이 유입되고, 4·3(1947년 3월 1일~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으로 일어난 대규모 주민 학살) 의한 소개민의 이입 등 급격한 인구 증가로 새로운 도시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 때부터 용담동에서 먹돌새기 동네가 형성되고 촌락이 비대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제주시 승격 이후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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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향교와 서문시장, 용담1동 노인회, 용담1동사무소, 인근 식당가 등을 들르면서 필자는 용담1동이 용담2동, 용담3동과 함께 용담동으로 묶여 있었다는 이야기를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원래 1950년대까지는 지금처럼 용담1동에서부터 용담3동까지 나누어진 동이 아니었다고 한다. 때문에 용담1동의 설촌과 지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전체 용담동의 설촌 이야기부터 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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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 ‘올바른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미래의 꿈을 열어가는 성실하고 창의적인 어린이를 기른다’를 교육 목표로 삼고 있고, 교훈은 ‘슬기롭게 행하고, 부지런히 배우고, 튼튼하게 살자’이다. 지금 한천 초등학교가 자리한 학구는 본래 제주 서 국민학교와 제주 중앙 국민학교에 속해 있었는데, 인구 증가와 지역 사회의 고도 성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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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에 사는 김성원은 물이 귀한 제주에서 용담동은 제주시에서 유일하게 한천과 병문천이라는 두 개의 큰 하천을 끼고 있는 마을인 만큼 좋은 용천수를 많이 갖고 있었다고 한다. 김성원이 어렸을 적에는 용천수가 솟는 곳에는 반드시 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을 물지게로 떠다가 집 안의 독에 채워 넣고는 그것을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용담동 물 하면 ‘한두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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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 터. 해륜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억불 정책으로 쇠퇴를 거듭하다가 1702년(숙종 28)에 제주절제사 겸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이형상에 의해 훼철되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는 해륜사와 관련해 “주성(州城) 동쪽에 만수사(萬壽寺)가 있고 서쪽에 해륜사(海輪寺)가 있어서 각각 불상은 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