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흥길이 쓴 중편소설. 1977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되었다. 윤흥길은 1973년 성남과 인연을 맺고, 1975년 성남을 떠났다. 도시 빈민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이때의 어려웠던 생활체험을 살려 쓴 것이다....
-
백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마음이 복잡했다. 자신을 낳아 준 엄마의 얼굴도 모른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니 생모가 따로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몰랐다. 그러다가 사춘기에 들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끝내 몰랐더라면 어땠을까? “사춘기 때 동네 사람들이, 인제 니네 엄마 새엄마다,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저는 아니다 우리 엄마다. 어머님이 좀 쎄셨어요. 그러다 보니까...
-
소년 구보의 어머니는 혼자 몸이었다. 생계를 위해서는 일거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집 짓는 공사장의 잡부가 되었다. 다행히 집짓는 일거리가 끊이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그렇게 번 돈을 조금씩 떼어 벽돌을 사다 날랐다. 그리고 저 아래쪽 개천의 모래를 퍼다 날랐다. 어머니도 형도 누나도 그리고 소년도 틈만 나면 개천의 모래를 세숫대야로 퍼다 날랐다. 그리고 시멘트를 사다가 조그만 집을...
-
백씨는 숭신여중을 거쳐 숭신여고를 다녔다. 집이 있는 태평동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은 산길이었다. 초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던 길이었지만, 가끔씩은 무서운 곳이기도 했다. “그 길이 지금도 아주 생생해요. 뒷길이 다 산길이었어요. 사고도 많이 보고 사람도 죽고, (거기서요) 예. (어쩌다가 사람이 죽어요) 그때 당시 어렸을 때 충격 먹은 게, 무슨 쫓아갔는데 살인 사건이래요. 뭘...
-
아내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궁씨는 아내가 고맙고 자랑스럽다. 아내는 1남 1녀의 아들 딸을 잘 키웠다. 딸은 대학에 다니고 아들은 대학을 준비 중이다. 그 아이들은 궁씨의 고향인 상대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의 고향도 상대원이다. “우리 아들 딸은 빨리 가자 왜 여기 살고 있냐 난 이유를 모르겠다 라는 쪽이에요 특히 아들네미가 그런 주장이...
-
지금의 상대원은 거의 차댈 데가 없을 정도로 도로를 차들이 점령하고 있다. 하지만 지석태가 자랄 때만 해도 거의 차가 없었고, 당시에는 체구도 작아서 동네길도 운동장처럼 느껴져서 동네만큼 놀기 좋은 곳도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바로 거기서 동네 친구들이랑 뛰어 노는 게 지석태에게는 제일 큰 재미이자 즐거움이었다. 그 곳에서 지석태는 평생 알아야 할 놀이나 게임의 8할을...
-
구보는 14살부터 일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에서 출퇴근 하거나 공장 기숙사에 들어가거나 혹은 혼자서 자취 생활을 하기도 했다. 공장 생활을 시작한 것은 전구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공단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동네에 떠도는 소문을 따라 찾아갔었다. 구보는 그곳에서 완성된 전구에 불이 켜지는지 검사했다. 1년 정도 했고 곧 옮겼다. 야구 글러브 공장에서는 글러브에 솜뭉치 같...
-
소년 구보의 집은 답십리 개천 주변에 있었다. 이삽십 평 남은 되는 집이었다. 끼니도 어려운 사정이었으니 집의 형편이야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어머니에게는 더없는 의지처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바람은 밖에서 불어왔다. 소년 구보가 초등학교 2학년 될 때쯤 서울은 재개발 바람이 불었고, 소년 구보가 살던 답십리 개천 일대도 철거 대상이 되었다. 구보의 나이 아홉 살,...
-
원다방에서 맞선 봤던 여자를 두 번째 만났을 때 구보는 청혼을 했다. 둘 다 혼기가 찬 상태였고, 서로 바쁘게 사니까 시간 끌 일 없이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여자 쪽에서도 자기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고 빨리 확답을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청혼을 받은 여자도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러자고 대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자는 서울 대치동에서 살았고, 신학생이었다. 그리고 목...
-
한 집안의 가장이 된 구보는 구두 공장에 다니면서 구두일 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들이 그랬다. 직접 구두 수선하는 일을 배워 보라고, 공장 다니는 것보다 보수가 훨씬 낫다고. 그도 그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한참을 망설이고 생각했다. 한 달 두 달 일 년, 그 이상 고민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문을 보게 되었다. 구두 세탁과 수선을 함께 하는 사람의 이야...
-
마님발 구두세탁소는 잘 되었다. IMF 경기 한파의 덕을 본 것이 운이 따랐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오토바이를 이용한 신속 수거 배달이 사람들에게 먹혔던 것이다. 가파른 언덕배기 많은 상대원 인근에서 오토바이는 영업에 없어서는 안 될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구보는 그게 늘 불안했다. 언덕배기에서 자칫 오토바이 사고라도 나는 날이면 큰 일이라는 생각이 때때로 머리를 스쳐...
-
집안이 워낙 가난한데다 직장생활하면서 벌었던 돈도 족족 탕진해 버린 터라 모아논 돈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 집 2층에 신혼집을 차리게 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산 것은 1년 남짓. 1년이 지나자 어머니는 400만 원을 내놓으시며 독립하도록 했다. 구보는 상대원2동에다 보증금 400만 원에 월 10만 원 하는 셋집을 얻었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 짜리 집이었다. 지하방은 늘 습...
-
구보의 삶에서 어머니는 조용하면서도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가 이렇게 안정된 삶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 어머니는 삶의 형편을 요리조리 재는 민첩함보다는 그냥 앞만 보고 무뚝뚝하게 살아오셨다. 그의 아내도 여지껏 처음 분양받은 땅에 그대로 살고계신 어머니의 삶이 참 인상적이라며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처음 어머니(가 성남에) 들어왔을 때 땅이 막 이렇게 땅으로...
-
구보가 아내를 만난 건 그로부터 2년 정도 지난 후였다. 나이가 서른 즈음이 된 신앙심 깊은 그에게 주변 사람들이 중매를 서겠다고 나섰다. 아주머니들은 언제나 신앙심 좋은 아가씨를 물망에 올려놓고, 청년과의 결혼 생활을 요모조모 그려보고 예상해 보았다. 구보의 집에 세들어 살던 젊은 아주머니도 그랬다.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고 이만 하면 되겠다는 판단을 하고서, 아는 친구의 여동생을...
-
소년 구보의 형은 집안의 장남이었고 기둥이었다. 형은 똑똑한 편이었고 공부도 좀 잘 했다. 형은 비인가 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다시 검정고시를 봐야 했다. 그래야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소년 구보는 포기해도 형만은 공부를 계속하기를 바랬다. 구보도 거기에는 별 불만이 없었다. 형이 좀 더 나은 집안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큰 바람이었...
-
아들 범구가 초등학교 3학년 되었나, 그 무렵에 분당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때 28평 아파트가 육칠천 갔었다. 그때 노씨 아줌마는 부업으로 벌어들인 꽤 큰 목돈을 쥐고 있어서 분당으로 이사갈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남편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깝고 후회스럽다. 그때 그 일을 실행에 옮겼다면, 하는 말로 그때 그거 잡았다면, 노씨 아줌마의 인생길이 많...
-
내 아버지는 무섭고 엄했다. 딸을 아들처럼 키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꿈도 이루고 인정도 받고, 리더가 될 수 있는 그런 강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였을까, 내 기억의 창고에는 아빠에게 혼나던 내가 참 많기도 하다. “강한 사람으로 키우겠다 해서 어렸을 때부터 혼났던 기억이 무지 많아요. 지금은 물론 아빠를 존경하기도 하고 감사하는 부분도 있지만, 어렸을 때 제가 필요로...
-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되었을 때, 지석태는 처음 성남을 벗어났다. 지하철로 학교에 통학을 했는데 처음엔 무척 재밌었다. “지하철이라는 게 재밌더라구요. 열차 타는 거 같고. 처음에 대학교 다닐 때 몇 달 간은 재밌었어요. 처음 타보잖아요. 지하철 처음 타는데 재밌었어요. 웃겨요.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게. 마주 보는 게 이상하지만 그때는 모든 게 재밌었어요. 신기하고. 대학생인데도...
-
노씨 아줌마는 삼영전자에서 2년 6개월을 근무하였다. 1년쯤 되었을 때 모범상을 탈 만큼 성실하게 일했고, 회사 생활은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일하다 쉬는 시간이면 잔디밭에서 음악을 들으며 놀았다. 무엇보다도, 같이 일하던 7, 8명의 또래 친구들이 있어서 더욱 좋았다. 그들은 회사 밖에서도 좋은 친구들이었다. 다들 집안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같이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우리 어...
-
범구는 노씨 아줌마의 큰 아들이다. 남편 강씨는 성남 상대원동 구석에서 이름도 없이 살지만, 범구만은 넓은 세상에 나가 살길 바랬다. 다행히 범구는 깐깐하면서도 화통하고 남자다웠다. 자기를 더 많이 닮은 큰 아들을 보면 노씨 아줌마는 뿌듯했다. 아들 범구는 공군사관학교를 가서 전투기 조종사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수술 자국이 있어서 불가능했다. 한동안 방황하는 범구를 노씨 아줌...
-
백씨는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남편의 석유가게 앞에서 튀김 같은 간식거리를 파는 장사였다. 사실 수익도 수익이지만, 포장마차를 차린 결정적인 이유는 남편을 가까이서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가게에 드나드는 놀음꾼들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리지 않으면 남편의 놀음 습관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빚도 갚아야 했다. 그래서 소중하게 키워오던, 꽃꽂이에 대한 꿈을 접어 버렸다....
-
그녀의 남편은 상대원1동에 자신의 석유가게를 내고 7년 간 운영했다. 그리고 잠깐의 외도(당구장 사업) 후에 상대원3동으로 옮겼다. 그 후로 지금까지 장장 9년의 세월이 흘렀다. 1994년도에 결혼을 했는데, 그 직후만 해도 석유가게의 석유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남편과 두 명의 기사들이 배달을 나가면, 그녀는 가게로 석유를 사러 오는 사람들을 상대했다. 손님들은 줄을 서서...
-
삶을 살아가면서 아쉬움을 느낀다는 것은, 사실 현재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겁도 없이 일수를 얻어 포장마차를 차렸던 때를 생각하면 아쉬움보다는 무서운 감정이 몰려든다. 남편의 사채 빚이 점차 늘어갔고, 가깝던 친척들이 다들 멀어져갔을 때, 백씨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포장마차 맞추고 그릇 사고 하는데 130이 들더라고요. 그걸 시작을 하면서 일단은 빚은 갚아야 할...
-
백씨는 꽃꽂이 강사를 하고 있었다. 몇 군데 강의를 나가면 적지 않은 강의료가 들어왔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강의료는 고스란히 남편의 카드빚을 갚는 데 들어갔다. 그런데도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은 집에 차압(압류)이 들어오기에 이르렀다. “그래갖고 집에 차압까지. 처음 봤어요, 진짜 남자들이 와가지고. 그때 당시 차압이 들어올려 하는데 딱 들고 나갔죠. 애기 아...
-
남편 강씨는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꼼꼼하고 가정적이긴 했지만,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을 노씨 아줌마는 좋아하지 않았다. 노씨 아줌마는 꿈도 많고 성격이 화통한 편이었다. 옆에서 밀어줄 테니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한번 밀어붙여 보라고 부추겨도 남편은 이리 재고 저리 재고하면서 평생을 직장에 매어 직장 생활을 했다. 부업을 해서 현금이 들어와도 노씨 아줌마는 기분 좋게 한 턱씩 내...
-
굽이굽이굽이 고생고생고생 하면서 살아오는 중에도 아이들 키우는 일이 제일 힘겨웠다. 내외가 장사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늘 저희들끼리 놀았다. 장사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집안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어지럽혀 있었다. 그럴 때면 큰 소리가 오가고, 속도 상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냉장고를 처음에 쪼매난 거 하나. 참 좋아서 죽겠더라고, 냉장고 사니....
-
가게는 쉬는 날이 없었다. 연중무휴로 장사를 했다. 언젠가는 여러 가게가 의논하여 정기 휴일을 정한 적이 있었다. 휴일이 되어 다른 용무를 보고 돌아왔는데 어느 집에서는 가게를 열고 손님을 받고 있었다. 신사협정은 그 후로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서 시장 상인들은 제대로 된 휴일도 찾아먹을 수 없었고, 그럴싸한 취미생활도 하지 못했다. 저녁이 되면 텔레비전 틀어놓고 꾸벅꾸벅 조...
-
궁씨는 상대원의 변화를 다른 부분에서도 느낀다. 상대원은 더 이상 폐쇄된 지역사회가 아니다. 상대원은 이미 세계를 향해 열린 사회이다. 상대원에 많이 생겨나기 시작한 다문화가정이 그것을 증명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문화가정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정책적으로 동사무소 같은 데서 외국인 대상의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궁씨와 같은 사진작가 중에는, 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작업...
-
상대원 재래시장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좀 비싼 가격이라도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깔끔한 매장을 선호한다. 최근 들어서는 온라인 쇼핑도 여기에 가세했다. 염씨의 딸도 한 달에 몇 번씩은 온라인 쇼핑을 이용하고 있다. 이래저래 상대원시장은 긴 침체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염씨가 운영하는 그릇가게도 월매출이 계속 줄더니, 요즘 들어서는 임대료 내고 가족...
-
소년 구보는 1963년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 315번지에서 태어났다. 당시 성남이라는 도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태어났다고 했지만, 그의 표현에 의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출생되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2남 2녀를 출생시키고 구보의 동생이 갓 돌을 지날 무렵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혼자가 되셨다. 아무 재산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네 명의 자식을 떠맡은 어머니의 서울살...
-
착실하게 석유가게를 운영하던 남편은, 군에서 제대한 조카의 꾐에 넘어가 대학가 앞에 당구장을 열었다. 처음에 당구장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녀는 극구 반대했다. 그냥 몸으로 벌어먹던 사람이 젊은 대학생들을 상대로 당구장을 잘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학생들을 상대로 당구장을 운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뭐랄까, 대학생들 저는 좀 실망을 했던 게, 저희가...
-
아버지에 대한 애증에서 벗어났던 대학 시절은 즐거웠다. 고교 시절 학교에서 받았던 여러 심적 갈등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나는 대학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맘껏 해방감을 누렸고 그것이 너무 좋았다. 외로움을 타지도 않았고, 새로운 환경이 낯설거나 힘들지도 않았다. 적응하는 데 문제도 없었다. “사실 대학교 기숙사는 특별히 4인 1실이 많거든요. 4인 1실에서 3년을 생활했었는데, 물...
-
석유가게를 접은 지 그럭저럭 1년이 지났을 때, 백씨의 남편은 상대원으로 돌아와서 다시 석유가게를 냈다. 원래 남편은 서울 마포 사람이었다. 총각 때 누나(지금의 시누이)를 쫓아 성남으로 왔다. 그리고 상대원 최초의 석유가게였던 대원석유에서 직원으로, 소장으로 일했었다. 총각 때부터 해오던 일이라 우선 시작하기는 쉬웠다. 석유는 전화 장사였기 때문에 고정 고객 확보가 중요했다. 그...
-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동아리 활동이 활발했다. 나는 한늘품이라는 독서토론부에서 가입했다. 남녀공학에서 몇 안 되는 여학생 전용 동아리였다. 여학생 끼리 모여 세계 명작, 한국 명작을 선정해서 읽고 토론하고, 가끔은 다른 학교를 섭외하여 같이 대외토론을 하기도 했다. 대부분 고등학생 수준으로는 쉽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토론했었다. 보통 네댓 개의 주제를 두고 한 달에 한 번씩 토요...
-
노씨 아줌마, 그녀는 강원도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아버지가 성남이 개발될 것이라는 정보를 어디서 주워듣고 와서는 보따리를 싸게 했다. 성남과의 느닷없는 인연이 시작된 것이었다. 물론 노씨 아줌마는 아직도 아버지의 정보의 출처를 알지 못한다. 출처조차 확실치 않는 정보에 의지해서 그녀의 가족은 1968년 무렵 성남으로 이주해 왔다. 그녀 나이 9살 무렵이었다. 아버지 대신 엄마의...
-
염씨는 요즘 들어서 세상살이가 더 걱정스럽다. 의학 발달로 수명은 길어져 가는데 늙어서 뭘 먹고 사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동백지구에서 장사를 하든 임대료를 받든 어떤 식으로든지 노후대책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다고 생각이 들고, 그러다 보면 나이 먹어 아파트 경비하고 파지나 고철 줍는 노인들이 그냥 보아 넘겨지지 않는다. 진짜 열심히 살았고 진짜 아끼며 살았다. 하...
-
어머니는 여러모로 노씨 아줌마에게 많이 기대고 있었다. 노씨 아줌마는 일찍 시집간 맏딸 대신이었다. 그녀 덕분에 어머니는 그나마 장사를 나다니며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씨 아줌마는 한 마디로 살림꾼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녀를 일찍 시집보내고 싶지 않았다. 딸이 선을 보고 남자를 사귀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저것이 벌써 시집갈 생각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서...
-
또또기계라고 했다. 하도매기계라고도 했다. 그것은 배낭 같은데 구멍을 내고 조리개를 끼워 압착하는 기계였다. 잠바 같은 옷의 똑딱이 단추도 그 기계로 달았다. 노씨 아줌마의 부업이 본격화된 것은 또또기계가 집에 들어온 이후였다. “첨에 6개월 작업이 있으니까 고거 좀 해 줍사 하고 어떤 제안이 왔어요 저한테. 어떤 사장이지 말하자면 하청 사장이 그런 식으로 제의가 와 가지고, 초창...
-
경험이 많아지면서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청소년기를 겪고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나는, 남들에게 뒤지거나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좁혀지지 않는 격차도 경험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애도 아니고, 어렸을 때는 우물 안에서 최고로 잘 났다고 그러고 살았었던 건데, 그게 아니었던 걸 알아가게 되는 삶이었던 거 같애요. 특히...
-
대학 때 중국어를 복수전공 하면서, 학교에서 보내주는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을 다녀왔다. 또 심리학 전공과 중국어 전공으로 교직 이수를 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그때는 미래가 잘 준비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그후 중학교 중국어 교사가 되기로 결정하고 임용고사 준비를 시작할 때만 해도 꿈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2년간 계속 낙방하고 말았다. 거듭 실패의 고배를 마시면...
-
봉씨가 1971년에 상대원으로 들어온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눈이 하얗게 내린 날 상대원고개 마루에서 버스를 내린 후로, 벌써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처음에 봉씨의 집은 미아리 천지극장 앞에 있었다. 봉병용이라는 사람의 소유였는데, 그는 일본에서 크게 성공한 자기형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면서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대던 사람이었다. 그가 일자리도 주었고, 가게가 딸린 방도 공짜...
-
IMF가 어떻게 지났는지, 시장 사람들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상대원시장은 다시 한 번 큰 변화에 내맡겨졌다. 상대원시장 한 가운데 대형 건물이 새로 들어서고 그 안에 마트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로 인해 재래시장 자체가 사라질 운명을 맞게 되었다. 많은 상가들과 노점들이 사라지고, 남은 상인들도 장사에서 이윤을 남기기는커녕 가진 돈을 더 밀어 넣어야 될 형편이었다. 염씨는 앞일...
-
백씨의 남편은 상대원에서 석유가게를 운영했다. 남편은 착하고 성실했으며, 석유가게는 굉장히 잘 되었다.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석유 배달을 했고, 그런 덕분에 돈을 꽤 모았다. 그러다가 남편은 다른 사업을 해보겠다고 했고, 어느 날 갑자기 새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석유장사 해서 모았던 1억 6천만 원을 불과 6개월 만에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
상대원시장에는 가게 앞마다 노점도 많았다. 노점을 하는 사람이나 상가를 운영하는 사람 모두가 상대원시장이라는 공동체 내에 있었다. 그들은 친목회도 같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염씨는 친목회 회원에게서 동업 제안을 받았다. 헌집을 매입하여 새집으로 지어 파는 일이었는데, 집을 많이 지어본 사람의 제안이라 거절하지 않았다....
-
봉씨는 보통 오전 9시에 가게 문을 연다. 그 시간에 아내는 집안일을 해결하고 좀 늦게 가게로 나온다. 벌써 오래된 생활 규칙이지만, 요즘은 낮 동안에 낮잠 자는 일이 많아졌다. 한참 바쁠 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가 내려오면 둘이 밥 먹고 낮에는 낮잠 자야지. 왜냐하면 손님 없으니까. 혼자 있을 때는 혼자 자버리는 거야. 손님 없으니까. 그러면 이제 한 사람은 보초...
-
노씨 아줌마는 2007년 10월에 상대원을 떠나 현재의 성남동으로 이사했다. 이사 전까지는 부업을 계속했다. 그녀는 스스로 생각해도 일복이 참 많았다. “진짜 수없이 밤낮없이 했어요. 어느 때는 새벽부터 일어나가지고 밥 간단하게 해주면서 애들 가기 전부터 시작을 해야 돼요. 그냥 뭐 몸빼바지 하나 주서 입고 허구헌 날, 그 시간대를 맞춰줘야 되니까 날짜를 맞춰줘야 되기 땜에. 제가...
-
노씨 아줌마는 부업하는 사람들이 손 못 놓는 이유를 잘 안다. 또 텔레비전 프로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부업하는 달인 아줌마들이 왜 그렇게 손이 빠르고 정확해졌는지 잘 안다. 노력한 만큼 정확하게 들어오는 돈 맛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20일 정도 한다면 될 거예요, 없을 땐 없고 있을 땐 있고 그러니까. 그러면 그게 보통 평균적으로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우리 아저...
-
신혼 초에는 그냥 집안일만 했다. 하지만 삶의 목표를 생각하면 뭐라도 해야 했다. 그러다가 주위 할머니들을 도와 심심풀이 삼아 도라지 까기를 시작했다. 상대원시장 상인에게서 도라지를 받아다가 한 양푼씩 까면 그 때 돈으로 1000원을 받았다. 1986년 즈음해서 우연히 지퍼 부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389단지의 쓰러져 가는 허름한 2층 기와집으로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
나는 상대원1동의 중원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렵게 사는 아이들이 많이 다니던 학교였다. 나이 들어 생각해 보면, 그 지역 아이들은 부모의 양육이 부재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많은 경우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끼리끼리 어울리고 놀았다. 그러다 보니 불량 끼가 있는 애들도 생겨났다.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발언을 잘 하지 못했고, 주눅도 잘 들었다. 편애가 심하던 6학년 때 담임 선...
-
염씨는 90년 분당 신도시 아파트에 당첨이 되었다. 장사에서도 이문이 많이 남았고, 거기다 집짓기 동업에서도 이윤이 있었던 터라, 그는 돈의 여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집짓기 동업자의 추천대로, 성남 시민이면 누구나 분양 신청이 가능한 시범단지를 노렸다. 하지만 경쟁률이 워낙 심했다. “그 다음서부터는 주택 청약예금인가 뭐를 얼마를 넣으면 하는 게 있었어요. 처음에는 삼십 몇 평 그...
-
지금 상대원은 본래의 느낌이 너무 없어졌다. 상대원은 이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낡은 도시의 한 지점에 불과하다. 지석태는 그것이 간혹 안타까움으로 다가섬을 느낀다. 안타까움은 그리움으로 전화된다. 그러면 그리움이란 우리의 삶에 무엇일까? 한낱 의고적 취향일 뿐일까? 상대원은 지석태에게는 또한 저만치 밀어두고 싶은, 묻어두고 싶은 장소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예전엔...
-
궁씨가 사진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부터였다. 흑백사진에 매료되어서 78년도부터 입문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 새나라백화점 7층에 있던 서울사진학원에서 배웠고, 우연치 않게 군 사진병 제도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고 사진병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성남에서 을지로5가까지 다니는 570번 버스 있었죠. 상대원에서는 저쪽에서는 66번 있었고. 그 버스들 완전히 콩나물이었어....
-
백씨는 남편을 만나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호적을 정리하면서 생모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다시 알게 되었다. 생모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도 줄곧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어 왔기 때문에, 생모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또 한 번의 충격이었다. 집에서는 생모의 행방을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경찰서에 생모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부탁해 보았지만, 서민의 아픔을 하나 하나 어루만지기에...
-
언제부턴가 상대원1동 쪽에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다. 공장에서는 서울서 온 철거민들이 일을 했다. 젊은 사람들부터 아저씨 아줌마들까지 상대원 공장으로 일을 다녔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온 총각 처녀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들 모두에게 인근의 상대원시장은 삶의 거점과 같은 곳이었다. 쉬는 날이 오면 상대원시장통에는 총각 처녀들로 넘쳐났다. “일요일 날 보면은 그 젊은 청년들이 아가...
-
궁씨는 3학년까지 성남초등학교를 다녔다. 성남 상대원을 비롯해서, 단대리, 수진리, 탄리, 그리고 모란에서도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다. 학교 가는 길은 그야말로 고개 넘고 물을 건너는 험한 길이었다. 황서고개와 박석고개를 넘어야 하는 학교길은 겨울엔 너무 추웠고, 날씨 좋은 날엔 가끔씩 출몰하는 문둥이 때문에 무시무시하기만 했다. 문둥이는 가끔씩 고갯길 이곳저곳에 나타나 등교하거나...
-
상대원 사람들 이야기는 성남시 상대원동 주민들의 구술 생애 자료를 서사물(이야기북)로 재구성한 것으로, 성남문화재단의 ‘우리동네문화공동체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라틴 아메리카의 작가 마르케스가 자신의 자서전에 쓰고 있듯이,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기억을 어떻게 이야기...
-
궁씨가 3년간 사진병 복무를 마치고 성남으로 돌아왔을 때, 성남에는 비디오 붐이 일었다. 결혼식, 회갑잔치 때 한 30~40분 찍어 편집해 주면 15원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금새 경쟁업체들이 생겨나면서 가격은 7~8만원 대로 떨어졌다. 그 후로 얼마동안 궁씨는 주중에는 전자제품 대리점을 하는 형님 가게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결혼식장에서 결혼식 사진을...
-
집에서 학교까지는 고작 5분 거리, 엎어지면 코 닿을 데였다. 그런데도 나는 부산스럽게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서 학교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혹시 지각할까 늘 걱정스러웠다. 그런데도 간혹 지각을 했다. 그때마다 심한 벌을 받았는데, 엎드려뻗쳐서 2-30분씩 버텨내는 벌이 많았다. 누구나처럼 나는 학교에서 칭찬도 받고 벌도 받았다. 변호사를 꿈꾸기도 하고, 기자를 꿈꾸기도 하고,...
-
원다방은 한 20평이나 25평 정도 되는 다방이었다. 테이블은 15개 정도 놓여 있었고, 그처럼 선보러 나온 사람들도 자주 볼 수 있던 곳이었다. 같은 교회 다니던 권사님 한분도 원다방에서 선을 봐서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90년 초만 해도 사람들은 만남의 장소로 다방을 주로 이용했었다. “당시에는 만날 장소가 성남 쪽에서는 특별한 장소가 없으니까 원다방이라든가 돌고래다방...
-
“상대원 재개발에 대해서 은근히 집에서도 기대를 하는 것 같아요. 확실한 어떤 정보를 가지고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여기 사는 사람들에겐 큰 관심거리죠. 재개발하면 과연 우리집은 어떻게 비싸게 팔릴까. 우리는 어떤 이익을 받을까. 그런 기대요. 여기 사람들은 재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너저분한 느낌을 많이 받잖아요. 요즘은 건물들이 다 많이 올라가 있는데 여긴...
-
나는 아직 흔들리는 중이다. 그렇지만 나에겐 꿈이 남아 있다. “청소년들을 되게 좋아해요.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하고 대화를 나눈다거나 얘기를 나누는 게 되게 기뻐요. 기쁘고 편하고 말이 너무 잘 통하고 그리고 아이들의 삶에 좋은 발전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 되게 보람을 많이 느끼고 그게 기쁘고 삶의 즐거움이거든요. 그래서 계속해서 교직을 도전을 해서, 교직 임용고시를 봐서...
-
여덟 살 때 다시 성남으로 돌아오기 전, 우리 가족은 이천 쪽에서 살았다. 아빠는 제조업 분야에서 일했다. 라켓을 만들던 한일라켓, 구두를 만들던 에스콰이어 공장에서 근무하였다. 이천은 아빠의 일터가 있던 곳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들과 들로 물로 돌아다니던 이천이 그립기도 하다. 그후 성남으로 다시 돌아온 우리 가족은 금광2동에 자리를 잡았다. 경사가 심한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
-
궁씨의 눈에는 상대원의 변화가 늘 안타깝다. 상대원이 자꾸 죽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뒷걸음질하는 상대원을 다시 활기찬 동네로 만드는 방법들이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마음처럼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상대원3동 자치센터 위원장을 맡고 있으면서 머리 속으로는 여러 가지 궁리를 해 보기도 했다. 우선 상대원에도 지하철이 필요해. 상대원을 지나는 버스가 아무리 늘어도 지하...
-
사진 작업을 하면서 궁씨는 상대원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 철거민들이 이주해 와서 천막치고 살던 69년, 70년부터 상대원은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처음 상대원동은 찌들은 인생들의 집합소였다. 삶은 어렵고 구차했었다. “옛날에 지금 공단이 2공단 3공단으로 돼 있거든요. 그런데 3공단 쪽이 늦게 생겨가지고 그 당시에 철거민들이 땅을 준 걸 팔고, 제가 어려...
-
상대원시장은 상대원공단과 지역적으로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궁씨는 상대원시장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공단의 인력을 시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주민 자치센터 위원장이 되면서부터는 그런 생각이 보다 분명하고 확고해졌다. 그래서 기회만 생기면 이런 생각을 말해 왔다. 오늘도 궁씨는 혹시 할 말을 빠뜨리지 않았나 걱정이다. “아 내가 한 마디 덜한 게 하나 있다. 지금...
-
상대원시장은 밥솥 같이 오목한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물을 부으면 물이 모이듯 재화가 그득하게 쌓일 장소이다. 시장 사람들은 오랫 동안 그 터에서 삶을 이어왔다. 웃는 날도 많았고, 힘들고 치열했던 날들도 있었다. 한때는 전대에 돈이 넘쳐나도록 장사가 잘 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형마트와 재래 점포가 분리되어 서로 소통하지 못하면서 시장 기능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구조적...
-
염씨는 성수시장에 가게를 열고, 순박한 시골 아가씨와 중매로 결혼도 했다. 하지만 장사는 하면 할수록 힘들었다. 가진 자본이 얼마 없는 것도 없는 거지만, 성격이 너무 고지식한 탓도 컸다. 장사를 하다 보면 물건을 외상으로 들여놓아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염씨는 도무지 그걸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진 돈이 없으면 필요한 물건도 제때 확보하지 못했다. 그렇게 고전을 하던 참에...
-
봉씨의 고향에서 땅 한 평에 4천원 하던 시절, 상대원에서는 20평에 2만원이었다. 한 평에 천원 꼴이었다. 그러니 300평 정도만 사서 팔면 남의 일 안하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고향 어른들에게 도리가 아닌 듯하여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봉씨는 더 이상 떠돌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집이라도 팔아 자리잡고 장사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미리 봐둔 가게 자리가 몇...
-
성남 사람들은 남한산성에 자주 오른다. 궁씨도 황송공원 쪽을 통해 자주 오른다. 황송공원에는 게이트볼을 하거나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이니까 등산도 하고 게이트볼도 치지만, 궁씨가 젊었을 당시에는 데이트 장소도 시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에는 젊었을 때 데이트 같은 건 종합시장이 제일 좋은 장소였죠. 종합시장 다음에 상대원시장 쪽이었죠. 상대원시장 쪽도 그 당시에는...
-
염씨는 분당 아파트에 입주한 지 10년 만에 팔아버렸다. 한국에서 월드컵 열풍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던 2002년이었다. 48평 아파트를 3억 5천에 달랑 팔아치웠으니, 지금 생각하면 싸도 너무 싼 가격이었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아파트가 최고점을 찍고 1년 만에 반토막에 가까워진 지금 시세보다도 싼 가격이었다. 그리고 염씨네는 다시 상대원동으로 들어왔다. 처음에 살던 장모님 소...
-
상대원의 첫 가게는 겨우 5,6평 정도 밖에 안 되는 조그만 크기였다. 그래도 시장 내에 자리가 난 가게는 거기 밖에 없었다. 가게를 상대원으로 옮기긴 했지만 장사 밑천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 연 가게라 단골 손님도 없었다. 가게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염씨는 아끼고 또 아껴야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게 그 때 여기 처음 이사와 가지고 김장을 50포긴가 했을 거예요. 김장...
-
상대원시장은 1970년대 초창기에 제일 좋았고, 80년대까지만 해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막내딸이 태어나고 얼마 후, 그러니까 87, 88년 쯤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그게 지금 있는 대형 상가가 새로 지어지고, 또 노전이 없어지면서 부터였다. “모란시장처럼 천막을 쳐놓고 양쪽으로 노전을 앉혀놓고 노전길에서 사람이 많이 다녔거든요. 그랬는데 저렇게 백화점 식으로 해놔 버리니...
-
상대원 아랫시장은 제대로 된 호황기를 맞았다. 장사가 잘 되니까 점포에는 권리금이 오고갔다. 가게 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많았는데 건물이 없는 형편이었다. 집들을 층을 올리고, 작은 지하실도 파서 활용하기도 했다. 한번은 지하에 다방을 내려고 터를 파다가 계속 물이 나는 바람에 무척 애를 먹은 적도 있었다. 상대원시장터가 원래는 늪지대였던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대형 상가를 짓고...
-
상대원은 이제 재개발 이야기가 나돈다. 봉씨가 생각하기에도 상대원은 많이 낙후되고 노후된 지역이 되어 버렸다. 마치 낡은 흑백필름 속의 세상을 보는 듯, 혹은 이미 오래 전에 변화가 멈춰버린 고립된 마을을 보는 듯하다. “새로운 신선한 이미지도 없고 노후될대로 됐고, 사람들도 전부 다 나태해졌고. 상인들도 요즘 들어온 사람들도 옛날에 있던 사람이 나태해 있으니까 나태해질 수밖에 없...
-
염씨네 가족이 아파트에서 좀 더 나은 삶을 꿈꾸기 시작했을 때, 염씨의 가게가 있는 상대원시장은 정반대의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분당 신도시로 인해 상대원시장은 차음 활력을 잃어갔다. 상대원시장의 손님들이 신도시에 들어선 백화점과 현대식 마트들로 발길을 돌렸다. 특히 분당의 백화점들이 운행하는 셔틀버스는 상대원시장에 치명적이었다. 상대원의 지역민들에게 새로운 쇼핑 기회를 제공했던...
-
상대원시장에는 이평원 씨라고 야채 장수가 있었다. 이평원 씨는 원래 웃시장에서 장사 잘하고 있었다. 70년대 초만 해도 재래시장에서 야채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품목이었다. 야채는 어려운 사람들이 매일 먹어야 하는 찬거리였다. 생선은 일주일에 한 번, 고기는 형편대로 먹고 없으면 안 먹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랫시장이 살아나려면 야채가게가 반드시 필요했다. “야채가 있어야 살...
-
상대원시장은 혼자서도 다닐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지금은 시장 형태가 없어졌지만, 지석태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예전의 상대원시장은 정말 시장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시장터가 그렇게 크지 않지만 어렸을 때니까 상대원시장이 그에게는 굉장히 크게 느껴졌다. 재래시장의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바로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시장이었는데. 지금 상대원시장은 큰 건물이...
-
봉씨는 요즘 손님 한명 한명이 아쉽다. 시절이 변하다 보니, 물건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장사를 해도 손님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기름장사도 거의 개점 휴업 상태이고, 예전에 그렇게 호황이던 고추장사도 힘들어졌다. “사실은 말만 기름장사지 기름 안 나갑니다. 왜 안 나가느냐. 요즘 주부들이요 맛을 보고 먹어야 되는데 맛을 모르고 값싼 거만 찾아 돌아다니니, 그러니 장사가 다 한...
-
봉씨는 70년대 초 호시절에는 옆 가게를 인수해서 3개까지 운영했다. 처음에는 기름가게로 시작했는데 나중에 고추를 추가했다. 그때 고추를 팔고 빻아주면서 벌었던 돈이 전대에서 흘러나올 정도였다. 한 달 벌이면 집을 한 채 살 정도였다. 손님은 넘쳐났고 장사는 잘 되었는데, 돈은 안 모아지고, 남는 것이 없었다. 고추를 시작한 후 일손이 딸려 종업원을 두게 되었는데, 종업원은 고향...
-
지석태의 스물 여덟 해 삶은 평범했다. 앞으로도 뭐 그리 특별한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살아온 스물 여덟 해 중에서 열다섯 해는 상대원에서 보낸 세월이었다. 비슷한 환경을 가진 상대원 주변 지역에서의 삶을 더하면 스물다섯 해를 보낸 셈이었다. 상대원은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 대학에 입학하고, 군복무를 하고, 다시 복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그의 삶의 근거지 역할을 했다. 물론...
-
상대원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중원초등학교 졸업생은 숭신여중이나 금광중학교, 아니면 대원여중[현 대원중학교]으로 진학했다. 내가 간 숭신여중은 공부를 많이 시키기로 유명했고, 두발이나 복장 규정이 까다로웠다. 많은 아이들이 그것을 싫어해서 금광중이나 대원여중으로 진학했다. 학교까지는 걷기에는 좀 먼 거리였다. 가끔씩은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기도 했지만(그게 누군지 기억에 없다...
-
백씨는 90년인가 어느 날 평화방송에서 꽃꽂이 강좌를 보다가 그것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처녀 시절에 아트 플라워와 분재를 배우던 취미가 꽃꽂이로 이어졌다. 좋은 선생을 찾아 월 수강료 70만원을 투자하였다. 전시회도 열심히 쫓아다녔다. 그리고 사범자격증도 땄고, 강의를 하기도 했다. 백씨는 다른 지역에서 꽃꽂이 강의를 하면서 상대원에도 꽃꽂이를 보급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따로...
-
봉씨가 처음 상대원으로 이사왔을 때 상대원의 땅값은 굉장히 쌌다. 한 평에 천원 남짓. 그런데 지금은 전국에서 성남만큼 땅값이 많이 오른 데가 없다. 상대원시장에서 장사하던 상인들 중에도 복덕방에 자주 놀러다니고 땅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모두 잘 산다. 반면에 착실히 장사만 했던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으로 끝이었다. 다행히 봉씨는 아내가 서둘러, 이사온 지 10여년 만에 집을 장만할...
-
봉씨는 막노동 판을 전전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열흘 일하고 나면 돈 받으러 다니는데 보름이 걸릴 정도였다. 아예 못 받는 경우도 생겼다. 그래서 한때는 화장품 장수가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해 보기도 했다. 400원에 가져다 450원에 팔고 다녔는데 그것도 잘 팔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아내가 임신중독증에 걸렸다. 봉씨는 사정이 급해 고향 어른들한테 거금...
-
상대원 사람들의 삶은 대부분 팍팍했다. 부모들은 삶에 쫓겨 아이들을 돌볼 겨를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의 간섭 없이 커 나갔다. 어떤 아이는 어려서부터 술과 담배를 배웠고 또 어떤 아이는 약간 방탕끼를 갖고 제멋대로 살았다.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객지로 떠도는 아이들도 간혹 있었다. 그도 한때 한동안 그런 방탕한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도 그런 부류의 친구들이었다. 희망...
-
처음 분양받은 상대원 집터 주변은 그 후 5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산을 깎아 급하게 만든 그곳에 생계를 이어갈 방편이나 일자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원 지역은 집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 집들이 지어졌다. “5년 이상 지나고 하니까 집들이 점점 생기기 시작하드만 71년 지나 5년 지나니까 어느 정도 들어서고, 한...
-
상대원에는 황촌말, 송촌말, 대원, 보통골, 사기막골 등 옛날 마을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토박이 궁씨는 옛날 마을들을 마음 속에 쉽게 그릴 수 있다. 황촌말은 요기 앞동네고, 대원은 상대원1동 사무소 뒤쪽으로 원주민촌이 있었다. 사기막골 같은 데는 상대원에서도 문화적 값어치가 나가는 동네이다. 궁씨는 간혹 성남의 문화유적을 촬영하러 나선다. 작년 여름에는 사기막골을 카메라에 담았...
-
처음 가게를 시작했을 때 봉씨는 무척 힘들었다. 큰 아이가 감기에 걸렸는데 약값이 없었다. 며칠이 지났는데 잘 걷던 아이의 다리가 마비 증상을 보였다. 그때부터 아이 치료를 위해 침 맞히러 다니랴, 장사하랴, 힘든 하루 하루가 이어졌다. 방도 따로 얻을 돈이 안 돼서 가게에 다락을 매달았다. “여기 가게가 루핑집이었는데, 다락을 매놨어요. 다락에다가 우리가 잠을 잤어요. 서랍장도...
-
상대원 아이들이라고 별다르게 놀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원의 지형적인 특성을 살린 특별한 놀이도 없었고. 어렸을 때는 사내들끼리 남성다움, 난 남자다 라는 것을 과시하려고 했던 약간 위험한 놀이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죽을라고 환장했는지 모르겠지만. 동네마다 비탈졌는데 제대로 비탈진 긴 거리가 많아요. 저 비탈진 끝부분엔 사거리고. 차들이 왔다갔다 하는. 골목길인데...
-
상대원은 검단산 남서쪽의 지대가 높고 기복이 심한 지역이다. 예로부터 보통골, 사기막골 등 몇 개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궁씨는 그것들이 합해져 상대원리가 되고 다시 상대원동이 되는 역사를 다 지나왔다. 예전에 비하면 인구도 많아졌고 살기도 좋아졌다. “옛날엔 상대원 1리 2리 이런 식으로, 상대원 1, 2, 3동까지 지금 현잰 바뀌어 있지 않습니까? 요새는 인구도 거의 8만...
-
노씨 아줌마는 현재의 성남동으로 이사한 후 집에서 하던 또또기계 부업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집 밖에서 하는 부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상대원동이 더욱 그립다. “직장이라고 나가보니까 진짜 아침부터 늦게까지 가서 돈 백만원. 여자들 뭐 기술 없고, 그리고 또 나이를 먹다보니까 써주는 데도 없어요. 진짜 힘든 데 밖에 없고, 알바 식이예요. 일도 안 써줘요. 그래도 내가 말하자면...
-
“제가 중원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저희 집에서 가까운 곳에 대일초등학교가 새로 생겼어요. 원래는 여중인가 여고가 썼던 건물인데 이사를 갔데요. 그래서 거기에 새로 대일초등학교가 들어선 거예요. 상대원3동에 살던 아이들은 의무적으로 그 학교로 전학을 가게 한 거죠. 아쉬운 건 그거에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제가 어떤 친구를 만났는지에 대한 기억은 솔직히 앨범 보면 날 수도 있잖아요....
-
지석태의 어머니는 전업 주부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목수였다. 목수는 정해진 출퇴근이 없었다. 그 당시 그의 집에는 마당이 있었는데, 마당은 아버지가 목공일을 하시는 장소였다. 아버지는 자개장을 만들었다. 조개껍데기 같은 게 붙은 검은 자개장은 당시만 해도 비싸게 팔리는 인기상품이었다. 아버지가 집에서 직접 만드는 자개장은 만들었고 또 손수 판매도 했다. 꽤 잘 나갔던 기억이 있다....
-
대학 입학을 위한 수학능력 시험은 한국의 모든 학생들에게 있어서 삶의 전환점과 같은 역할을 해 왔다. 그것은 성인의 길목에서 맞이하는 커다란 시련이며 도전이며 희망이 되는 셈이다. 나에게도 수능 직후에 삶의 변화 찾아왔다. 친구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를 다니면서부터 소망이라는 게 삶에서 생겨나는 것 같았다. 고교 시절을 보내면서 줄곧 증폭되어 가기만 하던 심적...
-
성남은 첫 발을 딛던 40년 전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변했다. 철거민이 막 들어와 하꼬방 슬라브집에서 살기 시작했던 것이 어제 같다. “제가 학교 다닐 무렵만 해도 시장 고쪽으로 개울 또 완전 산꼭대기고, 막 집이 듬성듬성 있고, 돌산이라고 그럴까 돌 있고, 덜렁 학교가 하나 지어 있었고 그랬었잖아요. 그때만 해도 물 사정도 안 좋고. 그래가지고 막 굉장했었어요, 청소 같...
-
어떤 할머니들은 전혀 거동을 못했다. 그러다 보니까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할머니들 대소변 수발을 들어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아무리 봉사가 좋다고 한들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너무 역겹기까지 했다. 그래도 할머니들의 삶의 자리를 휘 둘러보면 생겨나는 짠한 마음이 그녀를 그냥 돌아서지 못하게 했다. 귀가 안 들리는 할머니하고 장애를 갖고 있는 딸이 같...
-
노씨 아줌마는 아이들 교육에도 열성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학부모회는 가능한 전부 쫓아다녔다. 녹색어머니회 같은 교통 봉사 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노씨 아줌마는 한 가지 원칙을 지켰다. 학기 초 임원 선출이 있기 전까지는 그런 활동에 전혀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나름대로 자존심과 명예를 지키는 방식이라고 굳게 믿었다. 치맛바람 날...
-
헨젤과 그레텔처럼, 나는 잠자리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갓난아이도 자기를 귀여워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본다. 나는 어려서 아빠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기억이 별로 없다. 아빠와의 사이에는 많은 일이 있기 했지만, 잠자리에서 엿들은 대화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때 아빠는 분명 제가 너무 밉다고 말했었다.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을 듣고 나는 너무...
-
그래도 1996년 무렵까지는 어느 정도 장사가 유지되었다. 문제는 97년 IMF였다. IMF 1년 전부터 장사는 급격한 내리막을 걸었다. IMF가 뭔지 시장 사람들은 잘 몰랐다. 가게를 닫고 떠나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겨우 현상 유지를 하면서 IMF 터널을 벗어나길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염씨는 후자에 속했다. 장사는 가게 세내고 먹는 거 충당하고 나면 끝이었다. 그래도 그는 다...
-
나는 스물일곱 살의 성남 토박이이다. 잠깐 타지 생활을 했을 뿐, 태어나서 줄곧 성남에서 살아왔다. 스스로 봐도 자신이 성남이란 도시의 색채를 많이 갖고 있다. 그런 나의 20대의 삶은 여전히 흔들리는 중이다. 한때 청바지와 통기타로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가수가 있었다. 지금은 어느덧 50대 후반의 중견가수가 되어 있다. 라디오 DJ이기도 한 그녀는 청춘의 봄날보다 안정된 지금 50...
-
지역 자치센터 위원장을 맡고 있는 궁씨는 요즘 들어 상대원이 다시 되살아나 옛날의 활기를 되찾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원을 지나는 지하철 노선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 궁씨의 주장이다. “오히려 전철이라든가 이런 연계적인 거, 좀 더 상대원 쪽으로 갈 수 있는 방향으로 만들어 주는 게 어떻겠는냐 하는 생각도 들고. 8호선 같은 경우에도 아까 말씀드린대로 모...
-
초등학교 때 지석태의 어머니는 골목길에서 삼형제의 머리를 깎아주셨다. 당시 다른 친구들도 집에서 머리를 깎는 아이들이 많긴 했지만 그의 어머니처럼 집이 아닌 골목길에서 깎아주시던 분은 없었다. 삼형제가 골목에서 나란히 앉아 머리 깎을 차례를 기다리던 모습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 창피한데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앉아 있었다. “어렸을 때는 헤어스타일이 되게 우스웠어요. 지금도 어렸을 때...
-
노씨 아줌마는 하대원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쳤다. 지금의 대일초등학교 자리가 성남여중이었다. 그 전에는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에서 살았다. 친정은 워낙 못 살았다. 거기다 아버지는 팔방 난봉꾼으로 전국을 안 다닌 데 없이 떠돌아 다녔다. 당연히 칠남매는 어머니 혼자 책임을 지셨다. 어머니가 아무런 믿는 구석도 없이 성남으로 이주를 결정하신 것도, 시골에 땅 좀 있는 거 난봉꾼 아...
-
노씨 아줌마의 하루는 집안에서 시작해서 집안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동네에 사는 평범한 아주머니, 할머니, 그리고 앞집에 마주보고 살던 장애인 아주머니 정도가 대인 관계의 대부분이었다. 그들에게 노씨 아줌마는 아들의 이름, 범구 엄마로 통했다. 그들은 부업을 같이 하는 동업자였고, 삶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였다. “할머니들이고 아줌마들이 우리집이가 사랑방 마치 그렇게 살...
-
상대원시장은 위쪽일수록 장사가 잘 된다는 사실을 염씨는 얼마 가지 않아 알아차렸다. 그러던 차에, 82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근처에 새 건물이 지어지면서 가게 자리가 하나 났다. 염씨는 서둘러 계약을 했다. 처음 가게에서 네 가게 정도 떨어진 곳에 새로 얻은 가게는 염씨의 아내가 맡아보았다. “저는 밑에서 보고 제 집사람은 위에 쪼그만 가게 거기서 보고. 그렇게 장사를 하다보니까....
-
집에 큰 불이 났었다. 하지만 백씨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고, 영등포 살던 때의 일이라고, 어른들이 일러주어서 알고 있을 뿐이다. 그 화재 때문에 그녀의 가족은 성남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 또한 전해들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때 당시 월세방도 얻기 힘들었데요 영등포에. 근데 성남에 오니까 집 한 채 값이 되더래요. 월세 값도 안됐는데 그 돈이...
-
노씨 아줌마는 요즘 들어 문득 문득 또또기계 소리가 그립다. 또또기계는 소리가 여간 시끄럽지 않은 기계였다. 겨울에는 문을 닫고 기계를 돌리니까 좀 덜 하지만, 여름이면 문을 열어야 했다. 그러면 다닥다닥 붙은 이웃집들은 분명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웃들은 불평을 하기보다, 외려 열심히 사는 게 좋다고 하였다. 주위에 살던 동갑나기 친구들은 함께 작업을 했다. 아줌마...
-
염씨는 동백지구 상업용지 매입하고 싶었지만, 혼자서는 돈이 모자랐다. 은행동에서 그릇가게를 하는 여동생과 공동 투자 형식을 택했다. 남하고 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피붙이가 나을 듯 싶었다. 공개 입찰에 몰려든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서 염씨는 남들보다 좀 높은 가격으로 입찰에 응했다. 토지공사에 하는 거니까 정확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고, 또 토지공사 보증으로 60%까지 은행...
-
살길을 찾아 들어왔지만, 상대원에서도 먹고 살길이 막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릴없어 하다가, 얼마 전 지나가던 화장품 장사에게 물었던 것처럼, 지나가는 굴비장사를 보고 물었다. 굴비 장사하면 밥 먹고 사나요? 이 대목에서 재미있는 것은, 옛날 이야기 책에나 나올 만한 그 황당한 우연성이다. 그때 화장품 장사가 지나가지 않았고, 굴비 장사가 지나가지 않았다면 봉씨는 무엇을 하게 되었...
-
스스로의 노력, 삶에 대한 정성, 거기에 적당한 행운이 따르면서 구보의 삶은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결혼 이후 7년 동안 생기지 않던 아이도 태어났다. 첫 딸이 태어난 것이다. “우리 집사람이 몸이 좀 약했어요. 그래서 하나만 날라 그랬는데, 또 내가 외아들이었고, 어머니도 하나 더 낳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말씀 있었고, 주변 사람들도 하나는 너무 외롭다 둘 낳아야 된다 자꼬 주변에...
-
염씨가 상대원으로 왔던 80년대 초는 장사가 참 잘 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상대원공단은 활발하게 돌아갔고, 근로자들이 시장의 주요한 고객이었다. 젊은이들은 간이부엌이 딸린 방 하나 짜리에 주로 살았다. 방안에는 비키니 옷장 하나에 조그마한 호마이카상이 놓여 있었고, 부엌에는 석유 곤로와 밥공기와 국그릇 정도가 갖추어졌다. 또한 돌이나 백일이 되면 뷔페를 찾는 지금과는 달리, 8...
-
백씨는 요즘 함주부[함께하는 주부 모임]가 운영하는 ‘책이랑도서관’에 상근한다. 상대원 소외지역 청소년들이 찾는 작은 문화공간을 소중하게 돌보고 가꾸는 일이 그녀는 마음에 든다. 그리고 함주부 일을 하면서 상대원에서 벌어지는 문화 프로젝트에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2008년 들어 성남문화재단이 문화예술을 통해서 상대원시장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기획한 문화 프로젝트 중에는, 상대...
-
소년 구보는 스무살 청년이 되었다. 그 무렵 구보는 건축 공사장 야방 일을 시작했다. 야방은 공사장의 밤 경비 일이었다. 물론 낮에는 잡일이나 허드렛일도 거들어 주어야 했다. 그렇게 집짓는 현장을 한 곳 두 곳, 한 동 두 동 쫓아다니며 건축 일을 배웠다. 눈썰미가 좋은 구보는 그런대로 건축 일을 익혀갔다. 그때쯤 구보의 어머니는 집을 새로 짓기로 했고, 구보는 몇 년간 건축 일을...
-
궁씨는 결혼 전에 아내와 약속한 게 하나 있었다. 40대 넘으면 잘 살든 못 살든 사진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약속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통보였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마흔 다섯이 되던 2004년에 궁씨는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정식으로 사진을 배우러 대학 1학년에 입학한 것이다. 그리고 내처 대학원까지 다니고 있다. 내년이면 졸업 논문을 내야 한다. 고맙게도 궁씨의 아내는 이해심이...
-
궁씨는 성남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성남제일, 대원을 거쳐 중원초등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았다. 짧게는 6개월만에도 학교를 옮겼었다. 아버지의 직업이 이사를 많이 다녀서가 아니었다. 집은 늘 상대원에 있었다. “우리 사는 데는 상대원동이 한정돼 있는데, 인구가 늘어나니까 성남초등학교에서 성남제일로, 인제 다시 인구가 늘어나니까 대원초등학교를 지어서 대원초등학교로 왔다가, 또 인구가 많으니까...
-
...
-
나는 금광1동의 할머니 집에서 태어났다. 산부인과 병원이 아니라, 가정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뭔가 특별한 이력으로 생각될 때도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똘망똘망하고 고집 센 아이로 자랐다. “쪼그만 한데 고집 세고 노래 잘 부르고 뭐 그런 아이였던 거 같애요. 말도 잘 하고. 어렸을 때 또 욕심이 무지 많았어요. 애들을 막 휘어잡으려 하고, 그리고 그거는 초...
-
초등학교 3, 4학년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석태의 어머니는 어떤 동네 형을 집에 데려왔다.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났던 형인데 그에게서 석태의 삼형제는 장기의 기본을 배웠다. 그 후로 장기는 중요한 놀이의 하나가 되었다. “그 형이 근데 오래 안 가르쳐 줬어요. 그 날만 가르쳐줬던 거 같아요. 그 날 장기를 했는데 서로 엉망이잖아요. 규칙도 없어요. 이 형이 이렇게...
-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석태는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중원초등학교, 그 당시는 중원국민학교였다. 1학년 때 장난이 워낙 심해서 짝꿍이 여섯 번 바뀌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님 말씀에, 짝꿍이 여섯 번인가 바뀌었다고 하더라구요. 그것도 초반에. 학급이 딱 배치가 되면 짝꿍을 맺어주는데 여섯 번인가 바뀌었다고. 처음에 짝꿍을 붙여줬는데 엄청 괴롭히더래요. 금 그어 놓고. 금 넘...
-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는 집이 같은 방향인 친구들끼리 뭉쳐서 놀았다. 같이 집에 가는 도중에 누구네 집에 놀러간다든지 노래방을 간다든지 하는 일도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노래방이 생겨서 처음 가 봤는데 그 때는 한 곡당 500원, 만 원이면 스무 곡을 부를 수 있었다. 그렇게 노래방을 가든지 친구 집에 가서 만화책을 보든지 하면서 초등학생 때와는 놀이의 종류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
당시에 소년 구보의 집 주변에는 여전히 집이 몇 채 없었다. 대신 갈대처럼 우거진, 1미터 이상 되는 풀들이 사방팔방에 자라고 있었다. 풀밭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렇게 우거진 풀들도 장마철이 되면 빗물에 다 씻겨 내렸다. 상대원3동은 산을 깎아 잡은 터였다. 그래서 장마철이면 늘상 일이 터졌다. “상대원3동 모든 일대에 산을 다 깎아놓았기 때문에, 장마가 한번 지면은 1미...
-
상대원은 잘 사는 동네였고 은행동은 못사는 동네였다. 상대원공단이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69년도 70년도에 철거민들이 들어와 천막촌을 형성할 때만 해도 상대원동이 이렇게 활기를 띠게 될 것이라고 생각치 못했다. 처음 철거민이 들어왔을 때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동네였다. 아니 오히려 어린 궁씨에게 그건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처음에 철거민들 들어와 갖고 군용텐트 촥 쳐갖고 거기다가...
-
하굣길은 등굣길보다 재미있었다. 하굣길은 등굣길과는 달리 친구들과 같이였다. 등굣길은 학교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택해서 가지만 하굣길은 여러 길을 거쳐서 오는 경우도 많았다. 친구네 집을 들렀다가 오기도 하고 일부러 여러 곳을 둘러 둘러 오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가장 재미있는 곳은 바로 문방구였다. “중원초등학교를 떠올리면 문방구가 가장 기억나요. 그 중에서도 문방구에서 팔았던...
-
집에서 학교까지는 먼 거리였다. 아니 초등학생이 걷기에는 먼 거리였다. 지석태에게도 그 거리는 만만치 않았다. 당시 상대원동의 집들은 산에다 대충 막 지어놓은 것들이었다. 산을 규모 있게 깎아놓은 것도 아니고 산의 나무들만 어정쩡하게 베어버리고 그 곳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굴곡진 고개를 몇 개는 넘어야 학교로 갈 수 있었다. 초등학생 걸음으로는 30분 정도 걸렸는데 당시에는 굉장히...
-
나는 솔직히 독립 생활 혹은 결혼 생활을 상대원 같은 곳에서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상대원은 사람이 많이 산다. 그들 대부분은 어려운,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다.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좋은 교육을 받으면 좋은데, 상대원에서 그것은 좀 어려운 요구였다. 오히려 편부모 밑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아이들이 다른 지역보다 많았다. 또 술 때문에 불화를 겪는 가정이 많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
농협 옆에 돌고래다방이 있었다. 노씨 아줌마는 주로 그곳에 가서 음악을 들었다. MP3 기기가 발에 채이는 요즘에는 다방에 가서 음악 감상을 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는 젊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튼 그때는 음악 감상을 위해서 다방에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걔는 박천마을에 나는 이천마을에 살았거든요. 그러면 우리집을 지나서 가야 하는데, 그 친구가 맨날 거...
-
백씨는 상대원에서 18년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생모를 찾았고 아이를 출산했다. 신장이 좋지 않았던 그녀는 요관 수술을 크게 받았다. 그런데 수술이 있은 지 일년 만에 뱃속에 아이가 들어섰다. 결혼한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들어선 아이는 너무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건강한 사람도 아이를 가지면 심장이 눌리니까 힘든데, 저는 잘못하면 수술자...
-
궁씨가 중학생이었을 때 상대원공단은 활기가 넘쳤다. 아침 상대원 거리는 공단에 출퇴근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공단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어마어마 했어요 그냥 뭐 봇 진짜 그야말로 뭐 봇물이라고 그러나 막 밀고 들어가는 그러고 다녔어요 샤니케잌 뭐 또 콘티빵 뭐 이런 때는 진짜 인구 많았었고. 또 상대원에 방이 웬만하면 방이 조금만 꾸며서 놔도 다 세가 나가고, 어릴 때 우리집이...
-
궁씨는 지금도 상대원3동에 살고 있다. 1959년 태어나서 지금까지 상대원을 떠나본 적이 없는 터줏대감이다. 상대원 곳곳에 50년의 삶의 자취가 기록되어 있는 셈이다. 궁씨는 사진작가이며, 동시에 사진을 전공하는 대학원 학생이다. 상대원시장 입구의 한 5층 건물에 궁씨의 사진 작업실이 있다. 좀 낡은 계단을 올라 들어가게 되는 작업실에는 촬영도구들과 함께 그가 찍은 사진들이 놓여...
-
육아가 해결되어 집안이 안정되자, 장사도 차츰 나아졌다. 이후로는 큰 어려움이 없었고, 그렇게 다시 3년여가 흐르면서 돈도 좀 모아졌다. 그즈음 해서 위쪽 가게 바로 옆에 빈 가게 자리가 하나 났다. 그래서 염씨는 아래쪽에 있던 첫 가게를 정리하고 그리로 옮겼다. 아내가 맡은 가게와 자신이 맡아보는 가게가 이제 나란히 있게 되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20년 이상을 염씨는 같은 자리...
-
석유가게 앞 포차에 오는 손님 중에는 어린 아이도 많았다. 그중에는 포차에서 파는 튀김으로 끼니를 때우는 아이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아이의 아빠는 허리 디스크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아빠가 그녀의 포장마차를 찾아왔다. “처음에 저한테 왔드라고. 한달치를 드릴 테니까 아이들의 간식을 이걸로 줄 수 없녜.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엄마도 없고 그런 상...
-
7남매의 장남이라서 눈치가 빤했다. 그래서 염씨는 열 여섯 무렵에 고향 포천을 떠나야 했다. 조그만 시골 농사로는 얼마 안 되는 중학교 학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더구나 밑으로 동생들이 줄줄이 있었다. “제가 스스로 학교를 그만 뒀어요. 나 하나만 학교를 안다니면 그 밑에 동생들은 줄줄이 있고 나 혼자만 학교를 안다니면 부모님이 그렇게 고생을 안하실텐데. 그래서 안 되겠...
-
어느 동네에나 반푼이가 있고, 말이 어눌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지석태는 같은 동네의 철없던 고등학생 형을 기억한다. 조금은 한심스런 형이었다. “나이가 분명히 많은 형이었는데. 되게 차이 났어요. 키도 컸고. 저희는 초등학생이었는데 그 형은 고등학생인가 그랬어요. 저희들하고 같이 놀아요. 그 형이 이해가 안 돼요. 수준이 낮은 건지.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
염씨는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 어려울 때는 어려워서, 장사가 잘 될 때는 바빠서 못 다녔다. 장사하고, 돈 버는 일 외는 별다른 취미도 여가생활도 없었다. 친목회 일 이외에는, 시장 밖 나들이를 하는 경우도 흔치 않았다. 85년도에 상가 사람들이 모여 한우리라는 친목회를 만들었다. 꽃집 사장님도, 고춧집 사장님도, 옆에 앞에, 앞에 옆에 다 해서 열 몇 사람이었다. 고향을 따...
-
몰락해 가는 가정과 남편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기 위해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친구를 만나는 일도 삼갔다. 아니 차비를 걱정할 만큼 사정이 안 좋아 친구를 만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그녀는 함주부[함께하는 주부모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함주부를 통해 봉사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자신에게 닥친 최악의 상황이 자기만큼이나 힘겨운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도록 해 주...
-
초등학교 때였다. 근데, 이래도 되나? 내 이야기가 이렇게 이렇게 두서없어도 되나? 괜찮겠지. 어차피 이것은 나의 구술일 뿐이니까. 혹시 내 구술이 책으로 나온들 누가 그것을 읽겠어. 그냥 이 구술은 심심풀일 뿐야. 편하게 편하게... 초등학교 때는 음악을 되게 좋아했다.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하고, 방과 후에 학교에서 플루트를 배우기도 했다. 연말쯤에 있는 학교 학예회에서 플루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