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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380
한자 大榜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대방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곽현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대방리 개설
법정리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대방리 지도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8.36㎢
가구수 57가구
인구[남/여] 93명[남 46명/여 47명]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대방리(大榜里)는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갈현리(葛峴里), 용지리(龍池里), 일운리(日雲里), 금방동(錦榜洞)을 합한 후 금방동의 ‘방(榜)’ 자는 따왔으나 앞 글자 ‘대(大)’는 어디에서 따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는 갈현이 갈원이 되고 용지와 금방동은 그대로이며, 일운리는 사라지고 없다. 대방리 마을 앞 시내에 용소(龍沼)가 있는데, 이곳에 사는 용이 등천하면서 꼬리로 바위를 쳐서 바위가 두 조각이 되었다는 전설과 함께 용이 살던 못이라 하여 용지(龍池) 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대방리는 부녕 김씨(扶寧金氏)가 처음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어은리의 안산 생여봉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내리는 산맥이 추월산 서쪽 능선에서부터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흐르는 냇물에 가로막혀 머무르며 생겨난 마을이 갈원 마을이다. ‘갈원(渴院)’이란 한자를 보면 ‘목마를 갈(渴)’ 자와 ‘집 원(院)’ 자로, 목마른 집이란 뜻인데 목마른 집이 아니라 마을 앞에 깨끗한 물이 흘러 물이 풍부한 마을이다. 뒷산이 마치 거문고 형상으로 일곱 줄이 늘여 있어 칠현(七絃)이라 하였는데, 1914년 ‘칠’을 ‘칙’으로 간주하여 ‘갈현(葛峴)’으로 표기하였다. 광복 후 ‘갈(葛)’이 ‘갈(渴)’로 변하고, ‘현(晛)’이 ‘원(院)’으로 변한 원인은 알 수가 없다. 우리말의 변음이 심한 것은 사실이나 이와 같이 오기가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칠현(七絃)은 외칠현(外七絃)과 내칠현(內七絃)이 있어 고려 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본다. 외칠현 마을 앞에 700년 이상 된 많은 귀목을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베어 갔다고 한다. 6·25 전쟁 후 내칠현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외칠현으로 이거하였다.

생여봉은 산맥을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 한 가닥은 동북 방향 갈현 쪽으로 뻗어 가고, 또 한 가닥은 정반대 방향인 서남쪽으로 뻗어 나가 금방동을 거치면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전라남도 담양군 월산면과 경계를 이루면서 뻗어간 산맥이 추월 산맥이다. 금방동에 황액탁목의 명당에 얽힌 전설만 남아 있다.

밀재와 이어지는 마을 앞길은 옛날 담양, 광주에서 전라 감영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지름길이며 곡창지인 호남평야의 식량 운반로였다. 이 길에 통행이 잦을 때는 용지 마을도 번성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밀재와 이 마을 사이에 심적동(深寂洞), 대판이골[竹判谷], 일운리라고 하는 마을들이 있었으나 6·25 전쟁 후 없어졌고, 서쪽으로 1.2㎞ 지점에 있는 금방동만 몇 사람이 살고 있기에 두 마을이 용지 마을로 하나의 행정리로 기능한다.

[자연 환경]

대방리복흥면 정남쪽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4㎞쯤 달려가 726m 고지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산맥이 밀재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흐르는 물에 가로막혀 머무르는 곳이 용지 마을이다. 마을 뒤 서쪽으로 낮은 구릉이 형성되어 있고, 그 밖의 대부분 지역은 농지로 이용하는 넓은 평지다. 마을과 농경지를 사이에 두고 마을 앞으로 개천이 흐르며, 이 개천을 따라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현황]

2021년 12월 말 현재 대방리의 면적은 8.36㎢이고, 인구는 57가구, 93명으로 남자가 46명, 여자가 47명이다. 2개 행정리와 3개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주민들은 생업으로 복분자와 오미자를 재배하며, 밭곡식으로는 주로 고추를 재배한다. 농한기에는 주민들이 마을 회관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점심과 저녁을 해결하며, 농사와 관련한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지방도 897호선이 지나간다.

저수지 제방 왼쪽 30~40m쯤 된 서쪽 산기슭에 도자기를 굽던 터가 있다. 옛 일흥 마을로 6·25 전쟁 당시 폐촌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릇을 구워 내는 데 제일 많이 소모되고 필요한 화목(火木)과 도토와 자토, 백토, 고령토 등 도자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흙과 함께 물이 많아야 좋은 그릇을 만들 수 있기에 고려와 조선 시대 도공들은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춘 곳을 찾아 도기 터를 만들었을 것이리라 짐작된다. 노령산 줄기의 복흥 지역에는 연료림이 풍부하고 그릇을 만드는 데 쓰이는 흙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으며 물이 많아 여러 곳에서 많은 양의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이들 도자기는 전라남도 장성과 담양, 전라북도 정읍 등은 물론이고 섬진강과 서해 뱃길을 이용하여 일본, 중국 등지로 수출하였다. 고려자기 가마터는 현재 저수지에 침수되어 있으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청색 꽃무늬의 자기 파편으로 미루어 고급 그릇을 구워 내던 곳으로 보인다. 이곳 가마터 주인이던 조씨는 장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고 전한다. 저수지 물이 빠지면 현장을 답사할 수 있으며, 지금도 모래 같은 붉은 흙을 부비면 떡가루같이 분말된 특징이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10.11 현행화 [상세정보] 가구수, 인구 변경, [현황] 인구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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