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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805
한자 孝子申尙溶旌閭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 유촌 마을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승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08년연표보기 - 효자 신상용 정려각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875년 - 효자 신상용 정려각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9년 - 효자 신상용 정려각 중수
현 소재지 효자 신상용 정려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 유촌 마을 지도보기
성격 정려각
양식 겹처마 맞배지붕
관리자 신향수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신상용의 정려.

[개설]

신상용(申尙溶)[1577~1618]의 자는 명보(明甫), 호는 칠휴당(七休堂),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선전(宣傳) 신흡(申洽)의 아들로 순창 남산대(南山坮)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 생선을 먹고자 하니 한겨울에 강가에 나가 얼음을 깨어 잉어를 잡아 아버지에게 드렸다. 이 같은 노력에도 아버지가 돌아가 상여가 나가는데 장마로 내를 건널 수가 없었다. 신상용이 슬피 우니 느닷없이 물이 그쳐 상여가 나갈 수 있어 이후 그 내를 건천(乾川)이라고 불렀다. 시묘를 하면서 피눈물을 흘려 실명에 이르렀다. 상기가 끝난 뒤에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5년을 한결같이 묘에 다니다가 마침내 42세에 죽음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신상용에게 효자 정려(旌閭)를 내리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贈職)하였다. 신상용에 대한 기록은 『삼강록(三綱錄)』과 『옥천 군지』, 『여지도서(輿地圖書)』 등 여러 곳에 수록되어 있다. 『진양지(晋陽誌)』 권3 효행조(孝行條)에 “[신상용은] 원래 순창의 사인(士人)으로 경상도 진주 덕산(德山)에서 살았다. 사람됨이 기개가 크고 효성스러웠다. 아버지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죽만 먹었으며 밤낮으로 슬퍼하였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마을에 정문(旌門)을 내려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상용의 정려는 그가 살았던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남산대와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 진주의 덕산리(德山里)[현재 산청군 산청읍 부리 입구] 세 곳에 세워졌다.

[위치]

효자 신상용 정려(孝子申尙溶旌閭)순창군 유등면 유촌리 유촌 마을 동북쪽 무수리 길가 동쪽 산기슭에 있다.

[변천]

조정에서 신상용의 효행에 대해 1608년(선조 41) 정려를 명하였다. 1875년(고종 12)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의 정려각을 중건하였으며, 1999년 4월 다시 중수하였다.

[형태]

정려각은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규모는 184×184㎝이다. 정려각의 편액에는 ‘효자 증장령 신상용지려(孝子贈掌令申尙溶之閭)’라 적혀 있다. 또한 ‘칠휴당 정려 중수기(七休堂旌閭重修記)’라는 편액도 걸려 있는데, 이는 1883년 10월 1일 9세손 신종휴(申鍾休)가 글을 지었다.

[현황]

효자 신상용 정려는 2009년 현재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 신상용의 후손인 신향수가 관리하며,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신상용은 순창과 진주에 각각 정려가 세워져 있고, 국가의 기록물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조선 시대 순창을 대표하는 효자이며, 아울러 정려각은 역사적 유적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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