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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1041
한자 金世宗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황미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지 김세종 출생지 -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동정자 마을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김세종 거주지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복실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김세종 거주지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월곡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김세종 거주지 - 서울
학교|수학지 김세종 수학지 - 서울
학교|수학지 김세종 수학지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월곡리
활동지 김세종 활동지 - 서울
활동지 김세종 활동지 - 전라북도 순창군
활동지 김세종 활동지 - 전라남도 보성군
묘소 김세종 묘소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월곡리 지도보기

[정의]

개항기 순창 출신의 판소리 명창.

[개설]

김세종(金世宗)은 순창이 낳은 대명창이다. 그동안 학계의 조사에 의하면 김세종순창군 구림면 동정자 마을 김씨로, 그곳에서 출생하여 순창읍 복실리로 이사와 살았다. 이후 서울에 가서 활동하다가 내려온 뒤에는 순창군 팔덕면 월곡리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순창군청 홈페이지에서는 그의 출생지를 순창군 동계면 가작리로 지정하고 있다.

김세종이 서울에서 판소리 활동을 할 때 오랫동안 혼자 있었기 때문에 벼슬아치들이 나서서 예쁜 기생 하나를 소실로 인연을 맺게 해 주었는데, 금슬이 좋았던지 김세종이 예순 살이 넘어 고향으로 내려올 때 소실도 함께 데리고 와 순창읍 복실리에 둘 수가 없어서 팔덕면 월곡리에 집을 얻어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완숙기에 접어든 그의 소리는 순창의 월곡리에서 만개한 것으로 보인다. 김세종에게는 김공진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경상남도 산청군으로 이사하여 선비로 행세하였다고 전한다. 김공진은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약방을 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김세종의 후손들은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활동 사항]

송우룡(宋雨龍)·박만순(朴萬順)과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던 김세종은 동편제에 속한 대가라고 하는데, 송흥록(宋興錄) 계통과 달라서 별도의 계보를 형성하였다. 김세종송흥록을 찾아가 판소리를 배우려고 하였는데, 송흥록은 “너의 가문의 소리도 좋으니 그 소리를 연마하라”고 하면서 받아주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러기 때문에 김세종의 소리는 송흥록의 소리제와는 다른 소리로 학계는 평가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는 소리를 보면 송만갑(宋萬甲) 바디와 김세종 바디의 「춘향가」는 유사한 부분이 많다. 이는 남원과 순창이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지리적 측면의 유사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추론된다.

또한 『조선 창극사(朝鮮唱劇史)』에는 김세종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김세종은 순창 출신으로 헌종·철종·고종 3대간의 인물로, 송우룡·박만순과 병시하여 동파[동편제 소리꾼]에 속한 대가로 소개되어 있다. 문견의 고상함이 다른 광대에 비할 바 아니며, 문식이 넉넉하고 창극에 대한 이론과 비평은 당대 독보적인 존재로 자타가 공인한 것이다. 김세종신재효(申在孝)에게도 지침을 받으며, 그의 사랑에서 소리 사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신재효는 판소리 명창이 아니라 이론가였다. 그런 까닭에 판소리를 지도하려면 소리꾼이 있어야 했는데, 김세종이 이를 맡았다는 것이다. 김세종은 또 신재효의 지도로 이론 공부를 하였다. 이른바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명창인 셈이다. 그래서 김세종은 판소리 이론에서는 당대 최고의 동편제 명창 박만순[정읍 출신]이 승복할 정도였다고 한다.

[저술 및 작품]

김세종이 활약하였던 19세기 후반의 후기 8명창[박유전·박만순·이날치·김세종·송우룡·정창업·정춘풍·김창록·장재백·김찬업·이창윤 등] 시대는 전기 8명창[권삼득·송흥록·송광록·염계달·모흥갑·고수관·신만엽·김제철·주덕기·황해천 등] 시대의 명창들이 개발해 놓은 다양한 선율과 사설을 더욱 갈고 닦아 이론과 실제 면에서 판소리의 완성을 보던 시기다. 이 시기에 김세종은 중추적인 역할을 통하여 판소리 발전에 공헌하였다. 그의 판소리에 대한 정연한 이론과 식견은 지금까지 전해 오는 그의 발언록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이론과 실기에 탁월한 역량이 있었던 김세종은 창극이란 분야가 창을 주제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창의 억양과 장단이 규율에 맞아야 하지만, 창극인 만큼 극에 대한 의의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가령 ‘대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천 리강산 들어가니’를 부를 때에는 앉았다가 쪼그리고 쪼그린 데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면서 손으로 가리켜 천 리나 만 리나 들어가는 동작을 형용하여 창조와 맞아 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김세종의 판소리사의 업적은 극적인 내용을 최대한 살리어 소리판을 선도해 나간 것을 역설한 점이다. 이는 소리꾼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어단성장(語短聲長)[가사는 짧게 붙이고, 소리는 길게 부른다는 뜻]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김세종은 또 신재효가 경희루 낙성연에 최초의 여류 명창 진채선(陳彩仙)을 보낼 때 진채선을 남장을 시켜 서울까지 데리고 갔다고 한다. 김세종신재효 집에서 소리 선생을 하였고, 진채선신재효가 길러 낸 명창인 것을 보면 진채선의 소리도 김세종이 가르쳤을 가능성이 높다 할 수 있다. 이른바 여류 명창을 길러 낸 최초의 판소리 교육자로 김세종을 평가해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김세종은 「춘향가」를 특히 잘 하였으며, 그의 더늠[판소리에서 명창이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부르는 어떤 마당의 한 대목]은 ‘천자 뒤풀이’이다. 김세종의 「춘향가」는 김찬업(金贊業)을 거쳐 정응민(鄭應珉)을 통하여 보성 소리로 이어졌다. 이후 정권진·성우향·조상현·성창순 등에게 전해져 현재 가장 널리 부르는 「춘향가」 중 하나가 되었다.

김세종의 문하에서는 그와 더불어 후기 8명창으로 꼽히는 장재백(張在伯), 김찬업과 이들보다 한 세대 뒤로 근세 5명창이 되었던 이동백(李東伯)[1866~1947] 명창 등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김세종의 소리는 더 이상 동편제 지역에서 전승 세력을 확보하지 못하였고, 서편제 지역인 전라남도 보성으로 넘어가 보성 소리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지금도 보성 소리꾼들에 의해서 김세종판이라는 이름은 굳건하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김세종판 「춘향가」는 동편제의 다른 가닥으로 분류되는데, 주로 고창의 신재효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승 집단에서 기존의 판소리 사설과 음악의 내용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수정한 것이다. 이전의 「춘향가」 보다는 양반적 취향이 많이 가미되어 우아하고 섬세해진 모습이 김세종판 「춘향가」의 특징이다.

김세종 판 「춘향가」의 소리는 장재백, 김찬업, 진채선, 허금파, 성민주, 이동백으로 이어졌으며, 김찬업에서 정웅민으로, 정웅민에서 정권진,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으로 이어졌다.

[상훈과 추모]

광주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1호 남도 판소리 보유자 성창순(成昌順)은 정응민의 문하 시절을 회고하였는데 “나는 「춘향가」를 김세종판 「춘향가」로 배웠다. 정응민 선생님은 동편제 소리로 송만갑과 김세종판 두 바디의 「춘향가」를 갖고 계셨다. 이중 김세종판은 격조가 있고 성음이 독특한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배울 때 힘은 들었지만 그 소리는 귀하고 격이 있었다. 이 소리는 평조와 우조가 많아 진중하고 박자와 박자 사이의 부침새도 좋고 음 색깔이 변화가 많고 분명하며 격이 있다. 그래서 김세종판 「춘향가」는 젊은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점잖고 진중하게 풀어 나가 보성 소리의 참 맛을 보여 준다”라고 회고하였다. 동편제 지역에서 송만갑 판소리와 자웅을 겨뤘던 김세종 판소리가 현대에 와서 서편제 지역에서 더욱 크게 그 빛을 발하고 있는 모양새다. 따라서 후세의 명창들은 김세종을 동편과 서편제를 아울렀던 대명창이라고 추모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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