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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1049
한자 全琫準
이칭/별칭 해몽(海夢),전명숙(全明淑),녹두 장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숙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5년 12월 3일 - 전봉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4년 4월 4일 - 전봉준 부안 점령
활동 시기/일시 1894년 4월 27일 - 전봉준 전주성 점령
활동 시기/일시 1894년 12월 2일연표보기 - 전봉준 순창 피노리[현 쌍치면]에서 체포
몰년 시기/일시 1895년 3월 30일 - 전봉준 사망
출생지 전봉준 출생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63
사적비 전봉준 유적 -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이평면 조소1길 20[장내리 458-1]
추모비 전봉준 추모비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2가 1314-4
성격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
성별
본관 천안(天安)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에서 체포된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

[가계]

본관은 천안(天安). 호는 해몽(海夢), 초명은 명숙(明淑). 아버지는 전창혁(全彰赫)[전형호(全亨鎬)·전기창(全基昶)], 어머니는 언양 김씨이다. 처는 여산 송씨 송두옥(宋斗玉)의 딸이며, 남평 이씨 이문기(李文琦)의 딸과 재혼하였다. 첫 번째 부인은 전봉준 보다 네 살 연상이었다. 언제 혼인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봉준 나이 23세 때 송씨가 사망하였다. 첫 부인과 사이에는 두 명의 딸을 두었다.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활동 사항]

1. 출생과 동학 입교

전봉준(全琫準)은 1855년 12월 3일 태어났는데, 당시 아버지 나이 28세, 어머니 나이 34세였다. 전봉준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첫째, 전주 구미리(龜尾里)[완주·봉동면] 태생으로 어려서 태인현 감산면 계봉리[감곡면 황새얼]로 이주하였다는 설, 둘째 태인현 산회면 동곡리 지금곡[지금실] 태생이라는 설, 셋째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군 이평면 조소리 태생이라는 설, 넷째 고부군 궁동면 시목리[감냉기] 태생 설, 다섯째 고부군 남면 진장 문하 차복리 부근 태생 설, 여섯째 고창현 덕정면 당촌[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 부락]에서 출생하여 소년기에 고부로 이거하였다는 설 등이다. 현재는 학계에서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 마을에서 탄생하였다는 설로 의견을 조율하였다.

태생에 대한 학설이 갈리듯 전봉준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전창혁이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貪虐)에 못 이겨 항의하였다가 장독(杖毒)으로 맞아 죽었다는 설, 조병갑의 모친이 기생 출신이었는데 사망하니 조병갑이 전 향교 장의(掌議)였던 전창혁 등에게 부의금 2,000냥을 거두는 책임을 지웠는데, 전창혁이 이를 거부하였기에 보복으로 장살을 당하였다는 설, 장의가 아니라 동네에서 일을 보는 사람이었는데 부의금을 걷지 않았다 하여 관가에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는 설 등으로 나누어진다. 어찌되었든 전창혁의 죽음 이후 전봉준은 고부 봉기로 뛰어들게 되었다.

태인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 살 때 김개남(金開南)과 교류하였는데, 이 교류가 나중에 동학 농민 운동을 같이 하게 되는 동지를 만들어 주었다.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하기 전 전봉준의 가정 형편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1895년 공초 자료가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전봉준은 “전답 3두락을 가지고 있으며 아침에는 밥을, 저녁에는 겨우 죽을 먹을 정도”라고 말하였다. 즉 매우 빈곤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학 입교에 대해서는 1895년 3월 6일자 『동경 조일 신문』 동학당 대두목의 후속 심문을 보면 “평상시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데 1892년 김치도(金致道)에 의해 동학 문건을 건네받고 ‘정심(正心)’이라는 내용에 감동해서 입교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동학에 입교한 주목적을 “종교적 입장보다 탐관오리를 축출하고 보국안민의 대업을 이루려는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협동 일치와 결당(結黨)의 유용성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가렴주구(苛斂誅求)에 같이 시달리는 백성들의 모습이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킨 원인으로 보인다.

2. 동학 농민 운동 봉기

1894년 1월 10일 고부 봉기가 일어나고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갔고 정부는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았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가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리며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자 1894년 3월 하순 전봉준은 인근 동학 접주들에게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백산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1894년 4월 4일에는 부안을 점령하였으며 전주 진격 중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4월 12일에서 17일 사이에는 영광·함평·무안 일대로 진격하였으며, 4월 24일에는 장성을 출발하여 4월 27일에는 드디어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정부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한 상태였으며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도 한반도에 상륙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와 동학 농민군 양자 사이에는 5월 7일 전주 화약이 성립되어 폐정 개혁을 위하여 노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땅에 들어온 일본은 쉽게 물러나려 하지 않았고, 결국 동학 농민군은 다시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봉기하였으나 결국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에 전봉준순창 피노리(避老里)에 몸을 피해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 넘겨지고 말았다. 1994년 박환성[68] 씨의 증언에 의하면 전봉준이 잡혀가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관군이 주막을 에워싸니까 월동용으로 쌓아놓은 장작더미 꼭대기에 올라 버텼답니다. 관군은 장작에다 불을 질렀고 펄쩍 뛰어 담을 타넘는데 일본도에 회목[아킬레스건]을 맞아 주저앉았고요. 그날 밤새 하도 모질게 두들겨 패, 하루면 갈 길을 이틀 걸려 순창군청으로 끌고 갔다고 들었어요.”

당시 이런 전봉준과 동학 농민군에 대한 안타까움은 민중들의 노래로도 나타났다. “갑오세(甲午歲) 갑오세/ 을미적(乙未賊) 을미적거리면/ 병신(丙申) 되어 못 가리” 갑오년[1894년] 민중이 봉기하였으나 을미년[1895년] 왜적이 쳐들어오고 결국 병신년[1896년]에 봉기는 실패하고 말았다는 마음이 담긴 노래라 할 수 있다. 전봉준은 1895년 3월 30일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상훈과 추모]

1954년 천안 전씨 문중에서 정읍시 이평면 조소리에 사적비를 세웠으며, 1981년 한국 청년 회의소에서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에 있는 덕진 공원에 추모비를 세웠다.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63번지에는 전봉준 생가가 있다.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雙置面 金城里)에는 전봉준 장군이 붙잡힌 장소가 복원되어 2005년 5월 30일에 준공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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