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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가 항일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612
한자 申氏家抗日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숙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전개 시기/일시 1940년 1월 19일 - 재경 조선인 공산주의 그룹 이천우 검거
전개 시기/일시 1940년 1월 21일 - 재경 조선인 공산주의 그룹 김수진 검거
전개 시기/일시 1940년 2월 5일 - 신괴식, 신만식, 김용규, 이강진 검거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1년 9월 - 재요코하마 민족 공산주의 학생 그룹 형성
전개 시기/일시 1941년 12월 - 재요코하마 민족 공산주의 학생 그룹 독립운동 계획
종결 시기/일시 1950년 12월 3일 - 신형우 사망
성격 항일 운동
관련 인물/단체 신승우|신형우|신규식|신괴식|신만식

[정의]

1940년과 1941년 전라북도 순창군 남산대 신씨 문중 출신 5명이 일본의 도쿄, 요코하마 지역에서 벌인 항일 운동.

[역사적 배경]

태평양 전쟁이 개전되기 직전 일본 정부는 후방의 전쟁 체제를 확립하고 일본인의 사상운동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재일 조선인 유학생에 대한 감시와 탄압은 더욱 심해졌는데, 이로 인해 재일 조선인으로 유학중이던 순창 남산대 신씨 문중 출신 5명의 항일 운동이 발각되게 되었다.

[경과]

1940년대 말에 이르러 재일 조선인은 이미 110만 명을 넘었고 1941년 말에는 거의 150만 명에 육박하였다. 1941년 도쿄에만 중학교 이상 조선인 유학생이 1만 1318명이 있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재일 조선인의 교육 문제를 중요한 국가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회유와 탄압이 정책적으로 수행되던 시기에 전라북도 순창 지역 남산대 신씨가 5명은 항일 운동에 진력하였다. 신씨가 5명의 항일 운동은 ‘재요코하마[在橫濱] 민족 공산주의 학생 그룹’과 ‘재경[在東京] 조선인 공산주의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재요코하마 민족 공산주의 학생 그룹은 김용규(金容珪)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김용규는 1934년 10월 일본으로 왔는데 공산주의 사상자들과 교류하던 중 1941년 9월 우유 배달을 하며 메이지 대학에 다니던 신씨가 항일 운동원 중 한 명인 신승우(申升雨)를 만나게 된다. 신승우는 김용규에게 자신의 사촌 동생 신형우(申灐雨)와 조카 신규식(申奎植)을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룹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송호연(宋湖連), 이봉호(李鳳鎬), 박득규(朴得奎) 등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태평양 전쟁에 동반되는 사회 정세를 분석한 후 귀국하여 독립운동을 실행하기로 결심했으나 이들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가나가와현 경찰에 의해 검거되고 말았다. 이 7명 중 수형 사실은 신형우만 확인되는데 요코하마 형무소에 소장되어 있는 「형사 제1심 공판 시말서」[기록 번호 18(公) 149]에 따르면 신형우는 징역 1년 6월에 집행 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재경 조선인 공산주의 그룹 활동은 이천우(李天雨)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고창 출신 이천우는 전주 출신 김수진(金壽鎭)을 만나 공산주의 사회 실현을 위한 방법을 연구하였다. 이에 김제 출신 김용규, 전주 출신 이강진(李康鎭), 그리고 순창 출신 신괴식(申槐植), 신만식(申蔓植)과 어울려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하고 조선민족 해방을 위한 실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을 일찍부터 감시하고 있던 도쿄 경시청에 의해 1940년 1월 19일 이천우가 검거되었고, 1월 21일에 김수진이, 2월 5일에는 신괴식, 신만식, 김용규, 이강진 등이 검거되었다.

[결과]

재요코하마 민족 공산주의 학생 그룹 사건 이후 신형우는 귀국하여 순창 무수동에서 생활하다가 확실치는 않지만 1950년 12월 3일쯤 백운에서 병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승우와 신규식은 6·25 전쟁 이후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재경 조선인 공산주의 그룹에서 활동한 신괴식과 신만식의 이후 행적도 확인되지 않는다.

[의의와 평가]

당시 재일 항일 운동 단체는 일본 정부의 철저한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소규모의 비밀 조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재경 조선인 공산주의 그룹과 재요코하마 민족 공산주의 학생 그룹도 소규모 단체였다. 이처럼 소규모 두 단체에 순창 남산대 신씨가 출신이 5명이나 참여하여 활동한 사실은 매우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일본 정부의 감시가 매우 극심한 상황에서 사상을 통한 민족 해방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꿈틀거림이 남산대 신씨가를 통해 발현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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