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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간의 원혼 서린 형제굴과 형제암」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1804
한자 同氣間-寃魂-兄弟窟-兄弟庵
이칭/별칭 「형제굴과 형제 바위 전설」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정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2년 12월 - 「동기간의 원혼 서린 형제굴과 형제암」 『순창의 구전 설화』상에 수록
관련 지명 강천산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지도보기
성격 암석 유래담|지형지물 유래담
주요 등장 인물 의병 대장|산신령|하인|형제
모티프 유형 굶어죽은 형제|바위가 된 형제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에서 형제굴·형제암 등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동기간의 원혼 서린 형제굴과 형제암」은 왜적이 침입한 정유재란 당시 광덕산 전투가 벌어졌는데, 산신령으로부터 아들 형제를 살릴 방도를 알게 된 의병 대장은 두 아들을 강천산의 굴에 피신시켰으나 하인의 배신으로 형제가 굶어 죽어 바위가 되었다는 암석 유래담이다. 이를 「형제굴과 형제 바위 전설」이라고도 한다.

[채록/수집 상황]

2002년 12월 양상화가 엮어 순창 문화원에서 간행한 『순창의 구전 설화』상의 162~164쪽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정유재란이 일어난 때 왜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은 10만 부대를 이끌고 남원성을 함락하고, 전주로 향하기에 앞서 500여 명을 보내 비홍재를 넘어 순창을 치게 했다. 순창읍을 중심으로 모여 살던 사람들은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집을 비우고 사방으로 피난을 갔는데, 왜적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피난민들을 뒤쫓아서 몰살시켰다.

팔덕면 광덕산 아래 사정벌에서는 왜적과 의병들의 접전이 벌어졌는데, 여기에 출정한 한 의병 대장에게 아들 형제가 있었다. 이 아들 형제는 7대 독자로 의병 대장의 대를 이어갈 아들이었다. 왜적과의 전투에 출정하기 전날 밤 이 의병 대장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났다. 산신령이 말하기를 "가엾구나! 7대를 독신으로 내려오며 겨우 명맥을 유지해 오더니 이제 대가 끊기게 생겼으니. 대대로 너의 집 효성이 지극하여 아들 형제가 이 난리 통에도 살아날 방도를 일러 줄 터이니 그대로 시행하겠느냐?" 하였다. 의병 대장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그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산신령은 "그렇다면 내일 당장 새벽에 두 아들을 강천산으로 보내거라. 강천산 물줄기를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오른편 바위 절벽에 두 개의 굴이 보일 것이니 그 곳에 피신하도록 해라."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의병 대장은 너무도 신기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하인을 시켜 아들 형제를 신령님이 가르쳐 준 대로 강천산으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왜적과 결전을 벌이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하인을 따라 강천산 계곡 절벽에 있는 굴속에 숨어 살게 된 형제는 하인이 열흘 간격으로 꼬박꼬박 가져다주는 찰밥으로 연명하며 굴과 굴 사이에 칡넝쿨을 이어 놓고 이를 연락 수단으로 삼아 서로의 생사 안부를 묻고 안위를 살폈다. 하인이 깊은 산골에 음식을 나르는 몇 달 사이에 주인이 사정벌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하인은 형제를 돌보는 일이 성가시게만 느껴졌다.

어느 날 음식을 가지고 강천산으로 들어가던 하인은 어느 주막집에 들러 술을 몇 사발 들이키고는 그 주막집 주모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주모의 눈웃음과 간들간들한 목소리는 하인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하였다. 결국 홀어미였던 주모와 하인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고, 이런 하인에게 강천산에 있는 상전의 두 아들 형제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하인이 먹을 것을 가져오기를 기다리던 두 형제는 오지 않는 하인을 하염없이 기다렸으나 하인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기다림에 지친 두 형제는 굶주리다 못해 기진맥진하여 서로 어깨를 마주하고 간신히 길고 긴 계곡이 잘 보이는 산마루에 올라서서 하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몇 날 며칠을 기다렸으나 하인은 오지 않았다. 마침 엄동설한이라 추위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매서웠다. 밤이 되자 추위는 더 한층 기승을 부렸다. 산마루에서 하인을 기다리던 형제는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결국 형제는 하인을 기다리다 지쳐 딱딱한 바위로 변해 버렸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동기간의 원혼이 깃든 형제 바위라고 불렀고, 형제가 지내던 동굴을 형제굴이라 불렀다.

[모티프 분석]

「동기간의 원혼 서린 형제굴과 형제암」의 주요 모티프는 '굶어 죽은 형제', '바위가 된 형제' 등이다. 정유재란 때에 광덕산 전투를 피하여 강천산 굴속에 숨어 있던 형제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던 하인이 배반하자 굶어 죽어 바위가 되었다는 암석 유래담이다. 그래서 두 형제가 피신하여 살던 굴을 형제굴이라 하고, 형제가 죽어서 된 바위를 형제암 또는 형제 바위라 하였다는 일종의 지형지물 유래담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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