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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2003
한자 昌新驛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창신리 창신 마을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범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 시기/일시 1896년연표보기 - 창신역 폐지
성격

[정의]

조선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창신리에 있던 교통·통신을 담당한 역.

[개설]

역은 역관(驛館), 역참(驛站), 우역(郵驛) 등 다양하게 불리며 중국의 역전 제도(驛傳制度)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야기된다. 역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에서 우역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삼국 시대부터 있었으며, 고려 시대에도 존재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려의 역제를 이어받아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역은 여러 개가 묶여 역도(驛道)에 편입되었다. 역도란 역을 관리하기 위한 별도의 행정 구역이다. 즉 조선 시대에는 도로 상태와 중요도 혹은 산천의 거리에 따라 여러 개의 역을 묶어 하나의 역도에 편입시켜 관리하였다. 세종 때는 전국을 44역도 538속역[『세종실록지리지』]으로 조직하고, 세조 때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전국을 41개 역도에 537개 속역으로 분속시켰다. 순창은 경양도(景陽道)라는 역도에 속한 창신역이 있었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전라도 경양도의 관할 역이 8이다. 덕기(德基)·가림(加林)·인물(人物)·창신(昌新)·대부(大富)·금부(黔富)·오림(烏林)·광리(廣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창신역은 군의 동쪽 5리[약 2㎞]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같은 기사가 보인다.

『호남 읍지(湖南邑誌)』에는 “창신역은 군의 동쪽 5리[『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유등방(柳等坊)에 있다]에 있으며, 광주 경양역(慶陽驛)에 속해 있다. 남쪽으로는 경양 본 역까지 90리[약 36㎞]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갈담역까지 40리[약 16㎞]이며, 역리(驛吏) 31명, 역노(驛奴) 7명, 역비(驛婢) 4명, 대마(大馬) 2필과 기마(騎馬) 3필, 복마(卜馬) 2필이 있으며, 마위전(馬位田)으로 4결 40부, 답 49결 92부와 공수위답(公須位畓) 5결[昌新驛 在郡東五里 新增在柳等坊 屬光州慶陽驛 南抵慶陽本驛九十里 北抵葛潭驛四十里 驛吏三十一名 驛奴七名驛婢四名大馬二匹騎馬三匹卜馬二匹 馬位田四結四十負畓四十九結九十二負公須位畓五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관련 기록을 통해 볼 때 순창에는 경양도에 속한 창신역이 유등방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경양도에 덕기[담양]·가림[화순]·인물[능성]·창신[순창]·대부[옥과]·금부[동복]·오림·광리 역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경국대전』에는 경양, 덕기, 가림, 인물, 금부, 창신, 대부 등 7개 역이 보인다. 즉 경양도는 광주에서 옥과·곡성, 순창 방면, 광주에서 동복 방면, 광주에서 능주 방면으로 이어지는 역로였다고 하겠다. 『호남 읍지』에는 창신역의 역리와 역노비, 말과 전답 등의 내용이 적혀있어 창신역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변천]

창신역은 갑오개혁 이듬해인 1896년(고종 33)까지 존속하다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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