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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2068
한자 義兵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임숙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7년 8월 16일 - 남원성 함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7년 - 정유재란 발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27년 - 정묘호란 발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36년 12월 9일 - 병자호란 발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28년 - 이인좌의 난 발발

[정의]

전라북도 순창 지역을 포함한 전역에서 국가가 외세의 침입으로 위기를 맞았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일어난 민병.

[개설]

박은식(朴殷植)은 『한국 통사(韓國痛史)』에서 의병이란 ‘민군으로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싸우는 사람’이라 정의 내렸다. 자발적으로 일어난 부대이기에 자세한 기록이 없어 언제부터 의병이 생겨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래전부터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의병이 일어났기에 삼국 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여러 문헌에서 조선 시대 순창 지역 의병에 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1799년(정조 23)에 고정헌(高廷憲)이 간행한 『호남 절의록(湖南節義錄)』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이괄(李适)의 난, 정묘호란(丁卯胡亂), 병자호란(丙子胡亂), 이인좌(李麟佐)의 난 등 다섯 난 때에 호남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들에 대하여 쓰여 있다. 이 외에도 작자 미상과 시기 미상의 『호남 삼강록(湖南三綱錄)』, 1798년(정조 22)에 인출된 『정묘 거의록(丁卯擧義錄)』, 1770년과 1858년에 편찬된 작자 미상의 『병자호란 창의록(丙子胡亂倡義錄)』 등을 통해 조선 시대 순창의 의병에 대해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의병]

1. 임진왜란

1597년 8월 16일 남원성(南原城)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그 여세를 몰아 주력 부대는 전주(全州)를 공격하고 그 일대(一隊)는 순창 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때 순창 군수 배경남(裵慶男)은 왜적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주하였다. 군수가 도주한 상황에서 500여 명의 왜적들이 순창 읍민들을 잔악하게 도륙하였다.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재산을 약탈하였으며 도주하는 피난민을 추격하여 구암면 치천(溜川)무림면 단풍정(丹楓亭), 순창읍 아미산(娥媚山) 밑에서 몰살시켰다. 이에 순창군 풍산면옥출산성(玉出山城)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적들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또한 다른 길로 순창에 들어온 적들이 있었는데 전 현감 조유(趙腬)는 의병을 이끌고 팔덕면광덕산(廣德山) 아래에서 적과 싸우다 적탄에 전사했다. 부안 김홍원(金弘遠)은 의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사방에서 왜적을 물리쳤는데 이때 순창으로 넘어온 왜적을 추격하여 많은 적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 외 순창 출신으로 임진왜란 시 다른 지역 전투에서 활약한 의병을 보면, 김봉학(金奉鶴)은 78세의 고령에도 고경명(高敬命) 휘하에 들어가 싸우다 순절하였다. 양사형(楊士衡)고경명 의진에서 활약하였고, 1597년의 정유재란에도 정염(丁焰)과 함께 의병을 모아 왜적의 퇴로를 막고 진격하여 섬멸시켰다. 조여관(趙汝寬)한응성(韓應聖)조헌(趙憲)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다 조헌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여해 전사했다. 홍함(洪涵)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동 수백 명을 거느리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막하로 들어가 싸우다 전사했다.

2. 이괄의 난

이괄의 난은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웠음에도 관직이 높지 않은데 불만을 품은 이괄이 일으킨 반란이다. 당시 순창 출신 의병으로는 옹경신(邕景信)이 있다. 옹경신의 자는 이립(而立)이고 본관은 순창이다. 옹몽진(邕夢辰)의 손자이며 옹달생(邕達生)의 아들로 순창에서 태어났다. 이괄의 난 때 안현(鞍峴) 싸움에 나아가 적을 많이 참획하는 공을 세워 진무 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3. 병자호란

1627년(인조 5) 만주에 본거를 둔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오면서 조선은 다시 정묘호란이라는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조선인들이 오랑캐라 얕보던 이들이 쳐들어왔으나 조선 관군은 그에 대응하지 못하고 곳곳에서 패전을 거듭했다. 인조는 서둘러 강화도로 몽진했고 왕세자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전주로 내려왔다. 이후 조선 정부는 강화를 추진하였고 전쟁 시작 후 50여 일 만에 강화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후금의 사대(事大) 요구는 계속 심각해져 갔고 결국 후금의 태종은 마침내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오른 후 3개월이 지난 1636년(인조 14) 7월에 명(明)을 공격하였다. 12월 9일에는 청의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오면서 병자호란이 시작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순창 출신 의병인 양여균(楊汝筠), 양여매(楊汝梅), 양여장(楊汝樟), 양여숙(楊汝橚)은 일가친척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량 300석을 수송하고 가동 수백 명을 거느려 곧바로 남한산성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중도에서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군량을 조정에 바치고 돌아왔다. 정시직(鄭時稷)은 병자호란 당시 순창 군수 최온(崔蘊)을 따라서 같이 창의하여 북쪽으로 진군하였다. 하지만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실성통곡하며 돌아왔다.

4. 이인좌의 난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에 전국적인 내란 형태로 일어난 반란으로, 기존 연구에선 남인과 소론의 강경파들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소현 세자의 후손이었던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추대하려는 반정 형태로 이해되었다. 『호남 절의록』을 보면 당시 전라도 의병에 대해 알 수 있는데 순창 출신 의병으로는 김정헌(金廷獻)이 기록되어 있다.

[한말 의병]

한말 의병 활동은 나라를 침략하려는 일제의 야욕에 맞선 움직임으로, 경찰의 비밀기록에 따르면 1907년 12월부터 1908년 12월까지 전투만 1,976차례 일어났으며, 의병 숫자는 15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1년여의 기록만 보더라도 한말 의병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전라도의 의병들이 많은 활약을 펼쳤는데, 순창에서는 신보현(申甫鉉)양윤숙(楊允淑) 의병대가 유명하다.

신보현은 1868년 순창에서 태어나 1907~1909년에 순창을 중심으로 장성, 담양, 임실, 정읍, 태인, 고부 등지에서 활동했다. 1909년 12월 23일 정읍군 동면 석계촌(石溪村)에서 체포되었으며, 2008년 애족장을 받았다. 당시 그의 휘하에는 많은 의병이 있었으나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1909년 4월 일본 경찰의 보고에 80명, 5월의 보고에 65명, 7월 30명, 8월 50명, 10월에는 55명이라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50명에서 100여 명의 부하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의 부하로는 김관옥 (金冠玉), 김만룡(金萬龍), 김봉수(金鳳洙), 김선여(金善汝), 김재규(金在奎), 김재봉(金在鳳), 김홍석(金洪石), 마신엽(馬新葉), 마화춘(馬化春), 박복엽(朴復燁), 박선용(朴善用), 박송래(朴松來), 박중학(朴仲學), 박춘화(朴春化), 박판기(朴判基), 신자유(申子有), 오원칠(吳元七), 유공술(柳公述), 윤천만(尹千萬), 이문일(李文一), 이정순(李定順), 이태우(李台宇), 정기섭(鄭基涉), 정백영(鄭白永), 정태경(鄭泰京), 조성학(趙聖學), 최경서(崔京西), 최문경(崔文京), 최병길(崔丙吉), 최순택(崔順澤), 최성권(崔聖權), 최인숙(崔仁淑), 허판동(許判同) 등이 있다.

양윤숙양춘영(楊春泳)이라고도 한다. 양석민(楊錫民)과 해주 오씨의 세 아들 중 맏아들로 1875년 음력 12월 2일 순창군 구림면 금천리 국화촌에서 태어났다. 1908년 음력 4월에 최익현(崔益鉉)임병찬(林炳瓚)이 일으킨 의병에 참여하면서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고 『돈헌 유고(遯軒遺槁)』와 『남원 양씨 세적(南原楊氏世蹟)』, 「무신 의사(戊申義士) 전참봉 양춘영 사적비명」에 기록되어 있다. 1908년 7월 2일 산발적으로 활동하던 순창 회문산 근처의 의병들을 모아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하여 본격적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의병 숫자는 1,200명으로 그중 정예 120명이 직속 부하였다고 한다. 그의 산하에 있던 의병 대원은 다음과 같다.

강덕일(姜德日), 강한용(姜漢用), 김기룡(金基龍), 김기중(金淇重), 김봉률(金鳳律), 김사원(金士元), 김사윤(金士允), 김성길(金成吉), 김성룡(金成龍), 김성언(金成言), 김영복(金永福), 김윤서(金允西), 김인택(金仁宅), 김준경(金準京), 김집경(金集京), 김태일(金太一), 김형기(金炯基), 김흥룡(金興龍), 남행원(南幸元), 박가우(朴可又), 박경락(朴敬洛), 박경집(朴敬執), 박명준(朴明準), 박선경(朴善敬), 박용근(朴龍根), 박원서(朴元瑞), 박학실(朴學實), 배재신(裵在信), 배팔봉(裵八奉), 신구산(申九山), 신성모(申聖模), 신성심(申成心), 양경학(梁景學), 양윤택(楊允澤), 양춘범(楊春凡), 양학수(梁學洙), 엄일봉(嚴一奉), 오사연(吳士然), 오진국(吳振國), 옹권삼(雍權三), 옹태룡(雍太龍), 우도일(禹道一), 유재순(柳在順), 윤재일(尹在一), 이공영(李公榮), 이광신(李光信), 이국찬(李國燦), 이영선(李永先), 이육수(李六手), 이학윤(李學允), 이황룡(李黃龍), 임내익(林乃益), 임병수(林炳洙), 임순호(任洵鎬), 임유등(林柳等), 임태문(林泰文), 임태원(林泰源), 임화실(林化實), 장석봉(張石奉), 정기선(鄭基善), 제봉열(諸鳳烈), 조복동(趙福同), 조화중(趙化仲), 조명원(趙明元), 최광옥(崔光玉), 최기철(崔基喆), 최명칠(崔明七), 최산흥(崔山興), 최석봉(崔石奉), 최학천(崔學天), 최화(崔華), 홍중기(洪重基) 등이다.

이러한 소속 인원을 데리고 양윤숙은 일본인 경찰과 교전, 군자금 모집, 친일 세력 암살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910년 3월 9일 사형 선고를 받고 1910년 4월 14일 형 집행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 밖에 면암 최익현이 거의한 장소도 순창이다. 최익현은 1906년 3월 12일 순창으로 간다는 소문을 낸 후 4월 13일 태인의 무성 서원에서 창의의 뜻을 밝혔다. 15일 순창 구암사(龜岩寺)에 머물면서 의병을 모집했고 16일 순창읍에 입성했다. 4월 20일 전주 남원 진위대 병력이 포위하고 사격을 가해 정시해(鄭時海)가 유탄에 맞아 숨지자 의병들은 흩어졌다. 이에 최익현은 자신들을 포위한 군사가 관군임을 알고 의병을 해산하였고 자신은 포로가 되었다. 이태룡은 그의 논문 「최익현의 순창 의병과 유소 연구」에서 『면암집(勉庵集)』과 『매천 야록(梅泉野錄)』을 분석한 결과 순창 의병의 특징으로 장비가 매우 초라했으며 훈련받지 못하였고 조직적인 의진 편성 없이 의병을 모아 시위처럼 행동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 비밀문서인 「전라남도 폭도사」를 보면 “1906년 양력 6월 최익현과 전 낙안군수 임권하(林權夏)[임병찬]가 태인에서 60~70명을 모아 7일 순창 관아로 들어와 공금 50관, 화승총 15정, 화약 10근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는 등 비록 순창 의병이 조직적으로 훈련받지는 못했어도 일본과 싸우고자 하는 의지는 매우 높고 가히 용맹스러웠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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