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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집 유허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2091
한자 權潗遺墟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괴정리 135-1 서림 마을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진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665년 5월 28일 - 권집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716년 3월 3일 - 권집 사망
건립 시기/일시 1753년연표보기 - 권집 유허비 건립
현 소재지 권집 유허비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괴정리 135-1 지도보기
성격
관련 인물 권집(權潗)[1665~1716]
재질 화강암[좌대·개석]|해석(海石)[비신]
크기(높이,너비,두께) 비신 156㎝[높이]|69㎝[너비]|29㎝[두께], 개석 106㎝[높이]|69㎝[너비]|50㎝[두께]
소유자 이태원
관리자 이태원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괴정리에 있는 조선 후기 학자 권집의 효행과 사적을 기리는 비.

[개설]

권집(權潗)[1665~1716]은 본관이 안동(安東)이며, 자는 수옥(壽玉), 호는 화산(華山)이다. 초명은 권도이다. 화산이란 호는 권집이 경상도 안음[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서 순창 적성으로 이거하여 화산 아래서 생활하였으므로 짓게 되었다. 아버지는 권대의,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고조할아버지 권상은 벼슬이 동지중추에 이르러 후에 영의정 동흥 부원군에 증직되었고, 증조할아버지 권연은 현감을 지냈다. 할아버지 권달중과 아버지 권대의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권집이 살았던 숙종[재위 1675~1720] 대에 당파 싸움이 계속되어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이에 권집은 산간에 묻혀 살며 제자들에게도 “오늘 같은 세상을 살면서는 당론에 가담하여 소장(疏章)[상소문]을 올린다거나 하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이는 1701년(숙종 27)에 사약을 받고 죽은 희빈 장씨의 아들[훗날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 또 한번 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권집은 당호(堂號)를 극복재(克復齋)라 하였는데, 이는 공자가 역설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욕심을 버리고 사람이 본래 지녀야 할 예의와 범절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권집은 1716년(숙종 42) 3월 3일 자신이 살던 순창군 적성면 괴정리 서림 마을에서 52세로 일생을 마쳤다. 부인 이씨는 그보다 8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권집의 묘는 마을에서 약 2㎞ 떨어진 곳에 있으며, 부인은 처음 화산에 묻혔다가 후에 남편과 합장되었다. 저서로 『화산 유고(華山遺稿)』가 전한다.

[건립 경위]

권집은 살아 생전에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다고 전한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감과 젓갈을 무척이나 먹고 싶어했는데, 의원이 해롭다고 하자 어머니께 드리지 않고 자신도 평생 어머니를 생각하며 감과 젓갈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시묘를 하는 3년 동안에 묘소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고, 풍우와 한설을 이겨 내며 무릎을 꿇고 통곡하니 자리가 깊이 파여 풀이 돋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제자들이 권집의 효성을 기리고자 1753년(영조 29) 마을 어귀에 권집 유허비(權潗遺墟碑)를 세웠다.

[위치]

권집 유허비적성면 행정복지센터에서 동쪽으로 국도 24호선을 타고 가다 괴정 삼거리에서 우측 산길로 10㎞쯤 가면 나오는 서림 마을 어귀에 있다. 좌측 억대골에 권집이 살았던 화산이 있으며, 마을 앞에는 화림천이 흐른다. 마을에서 조금만 가면 순창군과 남원시의 경계가 나온다.

[형태]

일반적인 비신(碑身)과 개석(蓋石)을 갖춘 형태이지만 상당히 큰 편이다. 석질은 바다 돌을 사용하였는데, 그 속에 금이 박혀 있다는 풍문이 돌아 사람들이 몰래 금을 채취하느라 비석을 훼손하기도 하였다. 비석을 자세히 보면 노란 금이 박혀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며, 총알 등이 박힌 흔적도 보인다. 좌대(座臺)는 땅속에 묻혀 있고 비신은 높이 156㎝, 너비 69㎝, 두께 29㎝이며, 개석은 높이 106㎝, 너비 69㎝, 두께 50㎝이다.

[금석문]

비의 전면에는 해서로 ‘극복재 화산 선생 권공 유허비(克復齋華山先生權公遺墟碑)’라 쓰여 있고, 음기(陰記)에는 작은 글씨로 권집의 내력이 적혀 있다. 글자가 마모되어 판독할 수 없지만, 찬자(撰者)는 족손(族孫)인 통훈대부 행세자시강원 필선 겸 춘추관 편수관(通訓大夫行世子侍講院弼善兼春秋館編修官)이고, 서자(書者)는 종인(宗人) 후학(後學) 통훈대부 행사헌부 장령(通訓大夫行司憲府掌令) 아무개인데, 훼손되어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비문 앞부분에는 권씨의 시조인 권행에 대해 기록되어 있고, 그 뒤에 권집에 대한 내용을 적었다. 권집에 대한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화산은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자라면서 점차 기상이 호매하였으며 학문을 깨치는 데 매우 명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 또한 지극하여 의대를 바로하고 아침저녁으로 부모께 인사를 올리는 모습이 마치 장성한 어른 같았다. 권집이 11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병이 깊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는 잠시도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고 8년 동안 한결같이 병구완을 하며 한편으로 매일 하늘을 향하여 어머니의 쾌유를 빌었다. 그러나 어머니 박씨는 마침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권집이 어머니를 여윈 슬픔에 젖어 망연히 앉아 있을 때면 그 모습이 흡사 허수아비와도 같아 제비나 참새들이 놀라지 않고 그 머리 위를 날아 다녔다.

아버지는 눈을 뜬 채 운명하여 염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감기려 해도 눈이 감기지 않았는데, 권집이 간곡히 말하며 눈을 감기자 죽은 사람이 말을 듣는 듯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별세한 후에도 서모(庶母)에 대한 효행을 극진히 하였고, 그 슬하의 남녀 동생들에 대한 우애 또한 지극하였다.”

[현황]

권집 유허비 주위에 화강암으로 된 작은 경계석을 돌렸으며, 바닥은 시멘트로 처리되어 있다. 이태원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으며, 관리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11.16 현행화 [위치] 사무소→행정복지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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