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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흥면 의병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2286
한자 福興面義兵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순형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에서 근대에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병들의 활동.

[개설]

한말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순창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 출신지를 보면, 복흥쌍치, 구림 등 산악 지대 출신들이 많다. 의병들이 대체로 소규모로 유격전을 많이 했고, 그러다보니 산악 지대가 의병의 이동 통로 내지는 근거지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에 그 지역 사람들이 의병에 가담하거나 관련을 가질 기회가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의병대에서는 포수 출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산악 지역의 경우 포수 출신이 많다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순창의 대표적인 의병장인 신보현(申甫鉉)복흥, 채영찬(蔡永贊)[1854~1908]이 쌍치, 양윤숙(楊允淑)[1875~1910]이 구림 출신임이 이를 잘 보여준다. 특히 그 중에서도 복흥 출신들이 많은데 이는 복흥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복흥내장산, 백암산, 추월산, 산신산 등 산으로 둘러싸인 산지이다. 북서쪽은 군의 일부인 내장산을 통하여 정읍시 내장동, 입암면과 접하며, 백암산은 내장산 국립공원에 속한 산으로서 복흥과 입암면, 장성군 북하면에 걸쳐 있다. 산신산은 담양군 용면과 경계이다. 즉 복흥면은 북동쪽은 쌍치면, 북서쪽은 정읍시, 남서쪽으로는 장성군, 남동쪽으로는 담양군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도로도 정읍과 장성, 담양 방면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복흥은 정읍과 장성, 담양 등 타 지역 의병 운동의 영향도 받게 되며, 자연스럽게 의병 활동이 연계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이것이 복흥에서 특히 많은 의병이 배출된 원인이라 하겠다.

[을미 의병]

한말 의병은 을미년부터 시작한다. 일본이 명성 황후를 시해하고 을미개혁을 통해 단발령을 단행하자 분노한 유생들에 의해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순창에서 을미 의병의 활동이 있지는 않았지만, 복흥 사람인 국동완(鞠東完)[본관 담양, 자 찬서(贊書)] 의병장의 활동이 보인다. 국동완은 1867년(고종 4) 2월 17일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안평리에서 출생하여 5세에 복흥면 반월리 자포 마을로 이사해 성장했다. 1896년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체포되어 평리원에 수감 중 탈출, 이후 장성, 광산, 고창, 정읍, 부안, 흥덕, 고부 등 전라도 전역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1909년 체포, 총살되었다. 묘소가 복흥면 반월리 자포 마을 건너 별뫼 마을에 있으며, 1980년 대통령 표창 추서,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을사 의병]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으로 나라가 거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자 전국에서 의병 운동이 발발하였다. 이 시기 순창의 의병 운동은 최익현(崔益鉉) 의진과 관련되며, 김상기(金相璣), 채영찬, 채상순(蔡相淳)의 활약이 보인다. 김상기[본관 울산, 자 치옥(穉玉),호 성암(省庵)]는 하서(河西)김인후(金麟厚)의 14대손으로 복흥면 하리 사창 마을에서 1855년(철종 5) 출생하였다. 을사 보호 조약 조식을 듣고 울분의 나날을 보내다 1906년 담양용추사에서 최익현, 임병찬(林炳瓚) 일행과 회합하여 거병을 논의하였다. 김상기는 포수 및 의병 초모에 크게 기여했으며, 최익현 부대가 해산된 뒤에도 재기를 도모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다.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채영찬복흥면 산정리 내오 마을 171-1번지 539호 출신으로 포수였다. 최익현 의진에 가담해 대포장(大砲將)이 되었으며 이후에도 의병 활동을 계속하다 1907년 일본군에게 피살되었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 포장,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채상순(蔡相淳)은 채영찬의 종제로 산정리 내오 출신이며, 김상기 의진에서 활약하다가 체포, 탈옥했으나 일본군을 만나 단신으로 10여 명을 살해하고 전사하였다. 김성재(金聖載)는 복흥면 봉덕리 대가 마을 출신으로 함평의 의병장인 심남일(沈南一) 휘하에서 활약하였으며 남평, 강진, 장흥, 능주, 나주, 영암, 보승 등지에서 교전하였다. 농암리에 묘소가 있고,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정미 의병 및 이후]

1907년 헤이그 밀사를 구실로 고종이 폐위되고 군대가 해산되면서 또 한 차례 의병이 발발하였다. 군대 해산으로 전문적으로 군사 교육을 받은 군인 출신들이 가세하면서 의병의 기세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일본은 의병의 기세를 꺾기 위해 1909년 대대적인 남한 대토벌 작전을 펼쳤으며, 그 결과 상당히 많은 의병 부대가 궤멸되고, 살아남은 의병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 국경을 넘어 만주나 연해주로 가 독립군으로 전화하였다. 순창에서도 1908년~1909년 무렵 많은 의병들이 활약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이 신보현이다. 신보현은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순창을 중심으로 장성, 담양, 임실, 정읍, 태인, 고부 등 전라도 일대에서 활약했던 의병장인데 그의 가계나 성장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활동 지역이나 휘하 의병들을 볼 때 복흥면 출신으로 여겨지며, 순창에서는 복흥면 대방리 혹은 칠현리 출신으로 추정한다. 출생 연도는 1868년(고종 5) 쯤으로 본다. 휘하 의병수는 300명부터 수십 명으로 기록에 따라 차이가 나는데 유격전에 알맞은 수로 소규모로 몇 개 부대를 편성 활동했던 것으로 본다. 1909년 12월 23일 정읍시 동면 석계촌에서 체포되었는데, 그 후 휘하 의병들이 피체되어 재판 기록이 남아있으나 막상 신보현에 대한 재판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자손의 유무도 알 수 없다.

신보현 의병장 아래에서는 김선여(金善汝) 의병장과 김성칠(金成七 혹은 星七)[복흥면 사창, 농민, 징역 5년, 애국장], 정태경(鄭泰京)[1875년 생, 복흥면 화양리, 징역 3년], 김만룡(金萬龍)[1883년 생, 복흥면 양림동, 농민, 보급 활동, 징역 5년, 애족장], 박중학(朴仲學)[복흥면 농암리, 주막을 경영하며 정보 제공, 징역 3년], 최병길(崔丙吉)[복흥면 대가리, 농민, 물품 제공, 징역 1년], 박선용(朴善用)[1887년 생, 복흥면 반월리, 행상, 징역 1년, 애족장], 최인숙(崔仁淑)[1882년 생, 복흥면 하마리, 농민, 징역 1년], 정백영(鄭白永)[1868년 생, 복흥면 정동리, 농민, 징역 1년], 김관옥(金冠玉)[1886년 생, 복흥면], 박춘성(朴春成)[1855년 생, 복흥면, 여성], 최문경(崔文京)[복흥면, 농민], 최순택(崔順澤)[1882년 생, 복흥면 서마리], 이창용(李昌龍)[복흥면 답동리 농골 거주, 복흥면 신기리대롱산에 묘소], 백동녕(白東寧)[복흥면 지선리, 천보 대장], 윤천만(尹千萬)[복흥면, 신보현 참모] 등의 복흥 출신 의병들이 활약했다.

김선여 의병장은 복흥면 서마리 웃마제(上馬峙) 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8년 3월 신보현 의병장 휘하에서 선봉장이 되어 1909년 2월경까지 3백여 명 의병을 이끌고 순창, 정읍, 태인, 장성 등 곳곳에서 작전을 전개하였다. 1909년 3월에는 신보현 대장을 떠나 순창군 복흥면백방산에서 동지 40여 명을 모아 지휘하였고, 그해 9월까지 순창, 담양 등지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1910년 4월 21일 대구 공소원에서 교수형을 선고 받아 형이 집행되었으며, 1995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선여 휘하에서 김재화(金在化)[복흥면 서마리, 농민, 징역 3년), 김응선(金應先)[복흥면 산정리, 농민, 징역 2년 6개월, 애족장], 김치문(金致文)[1880 생, 복흥면 구은리] 등이 활동했다.

신보현 의병대의 이창용 의병은 1909년 2월 혼인하고 3월에 신보현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순창, 담양, 장성, 정읍 등 지역에서 계속 전투에 참여하다 8월 30일 복흥면백방산 전투에서 22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복흥면 답동리 신기 마을대용산에 묘소가 있다. 백동녕 의병은 신보현 대장 휘하에서 천보 대장으로 활약했는데 힘이 장사여서 대포를 메고 순창, 담양, 장성, 정읍 등지를 신보현 대장과 함께 누비며 사력을 다해 싸웠다. 어느날 복흥면 농암리삼치장 주막집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일본 순사가 와서 백동녕을 잡는데 정보를 주면 포상하겠다고 하였다. 백동녕은 안에서 듣고도 당황하지 않고 밥을 다 먹고 나가서 “내가 백동녕이다”라고 하면서 순사 목을 감아쥐고 끌고 가다가 길가에 내던지니 순사는 이미 죽었다고 한다. 힘이 얼마나 세었으면 멱살을 잡아 쥐었는데 죽겠느냐고 두고두고 이야기되었다. 백동녕은 신보현 의병 대장이 채포되고 동지들이 분산되자 천보대를 메고 다니다가 부상을 당하여 내장산 서래봉 밑 바위를 들어올려 그 속에 숨기고 김제로 도망가 고용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사후에는 고향 땅 복흥면 지선리에 안장되었다.

유종여(柳種汝) 의병대에서는 장순흥(張順興)[복흥면 칠립리, 농민, 식료품과 짚신 조달, 징역 10월], 김상용(金相龍)[복흥면 대각동, 군자금 활동, 징역 7년], 조양현(趙良玄)[복흥면 칠립리, 농민, 군자금 및 유격 활동, 징역 7년], 김병갑(金炳甲)[복흥면 동서리, 징역 2년, 애족장], 최순종(崔順宗)[복흥면 용지촌, 농민, 징역 1년], 최명오(崔明五)[복흥면 두촌리, 군자금 활동], 홍만순(洪萬順)[복흥면 동서리, 군자금 활동], 박내문(朴乃文)[복흥면 시황리], 조경춘(趙京春)[복흥면 칠립리], 김투철(金投哲)[복흥면 칠언리], 장영심(張永心)[복흥면 칠언리], 최명옥(崔明玉)[복흥면 갑조리] 등이 활동하였다.

김봉현(金鳳玄)[복흥면 갈현리, 군자금 활동, 징역 7년]은 김봉근(金奉根)[복흥면 농골] 의병대에서 활동했으며, 이경선(李敬善)[상치등면 농동]은 김봉근 및 유종여 의병대에서 활약하였다. 구영숙(具永淑)[복흥면 송정]은 김봉근 및 양윤숙 의병대에서 활동하였고, 장문동(張汶同)[복흥면 농소리, 농민, 군자금 활동, 징역 5년]은 김여회(金汝會) 의병대에서 싸웠다. 추재엽(秋再葉)[복흥면 칠립리, 농민, 군자금 활동, 징역 5년]은 처음 유종여 의병대에 들어갔다가 곧 이성화(李成化)[전북, 독립장] 의병대로 옮겨 활동하였다. 권얼동(權乻同)[복흥면 구산리, 농민, 징역 1년]은 유창호 의병대에서, 김석기(金石奇)[복흥면 서마리, 농민, 정보 제공, 징역 1년]는 박도경(朴道京)[고창, 독립장] 의병대에서 활동하였다. 이 외 소속을 알 수 없거나 기록이 미진한 복흥 출신 의병으로 이순구(李順[舜]九)[복흥면 봉덕리], 정백일(鄭百一)[복흥면], 송태선(宋泰善)[1889년 생, 복흥면 자포곡], 김진문(金진文[ 복흥면 구은리], 이원숙(李元淑), 김중화(金仲化)[복흥면 답동리], 이승재(李承宰), 이치민(李致民), 김동식(金東植), 설영환(薛永煥), 신월준(辛月俊), 전병국(田炳國), 정종기(鄭鍾基), 신창희(申昌熙), 정우익(鄭佑益), 조동홍(曺東洪), 임화지(林和地), 권천□, 박명준(朴明準), 박홍석(朴弘石) 등이 있다.

[참고문헌]
  • 복흥면지(복흥면지 발간 위원회, 2011)
  • 전북 의병사(전북 향토 문화 연구회, 1990)
  • 공훈 전자 사료관
  • 자료 제공(복흥면지 편찬위원장, 이석남, 2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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