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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2288
한자 李德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무수리 산115-2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강신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종친
성별
본관 전주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의 종친.

[가계]

본관 전주. 선조(宣祖)의 형인 현록대부(顯祿大夫)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1545∼1597]의 다섯째 아들로, 할아버지는 중종의 아들인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이다. 처는 생원(生員) 충주인(忠州人) 어복원(魚復元)의 딸 신부인(愼夫人) 어씨(魚氏)이다.

[활동 사항]

이덕령(李德齡)[1575~1638]은 13세에 장림령(長臨令)의 봉작을 받고, 그 후 장림수(長臨守)를 거쳐 장림부정(長臨副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이복형 익성군(益城君)이 아버지 하원군(河原君)을 모시고 임금을 호종하며, 거가(車駕)를 따르자 18세였던 이덕령도 분연히 거가를 뒤 따르려 하였다. 아버지와 형이 나이가 어리다고 제지하자 울면서 말하길 "군부(君父)가 난을 만났는데 신하의 몸으로 어찌 감히 편안함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맨발로 보호하며, 수행하였다. 선조가 도성으로 환도함에 이르러 장림정(長臨正)으로 승진되었다.

광해군이 왕위를 물려받고, 혼란함이 날로 심해지자 여러 번 충언을 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나라가 혼란하고, 망하는 꼴을 차마 볼 수 없다하여 중국은나라미자(微子)가 은둔하듯이 관악산에 은둔하여 기둥 몇 개로 얽어 집을 짓고 살면서 장차 생을 마치려 하였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선비들이 찾아와 학도들이 날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성품과 법도가 공손하고, 검소하며, 마음을 화평하고 기쁘게 대해 주었다. 아울러 총명하고 민첩하며, 재주가 뛰어났는데, 접대는 후하게 하고 재능에 따라 가르쳤으니 모두 문예(文藝)의 경지에 나가게 되었다. 또한 한 마디 선언(善言)을 듣고, 한 가지 선행을 볼 때마다 잊지 않고 잘 지켰다.

1626년(인조 4년) 창선대부(彰善大夫)에 제수되었으나 선비의 절개를 고집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와 강화(講和)를 하자 근심하고 분하여 병까지 들었다. 인조가 듣고 매우 걱정하며 장림도정(長臨都正)에 제수하고 명선대부(明善大夫)로 가자하며 어의(御醫)를 보내 치료받게 하였다. 그러나 1638년(인조 16년) 10월 2일 향년 64세로 별세하였다.

[묘소]

처음에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상초리 마랑동[현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에 예장하였다가 이후 1969년 4월 5일 후손에 의해 전북 순창군 유등면 화탄리 갑좌[현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무수리 산 115-2]에 이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울러 1982년 4월 4일에는 마모된 신도비를 다시 세우고, 묘 아래에 사당인 영모재(永慕齋)를 건립하여 매년 음력 10월 6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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