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35 |
---|---|
한자 | 洪思九 |
영어공식명칭 | Hong Sa-gu |
이칭/별칭 | 우용(又容),하포(下浦)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영배 |
[정의]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개설]
홍사구(洪思九)[1878~1896]는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스승 안승우(安承禹)[1865~1896]를 도와 제천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896년 제천 남산전투에서 순국하였다.
[가계]
홍사구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우용(又容), 호는 하포(下浦)이다. 아버지는 홍성유(洪聖裕)이며,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홍훈(洪薰)의 종손이다. 출생지는 경상도 순흥도호부 수민단면 원구[지금의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원두들마을]이다.
[활동 사항]
홍사구는 명문가의 종손으로 가산이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런 가운데 경기도 지평현 상석리로 이사하여 안승우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평소 홍사구는 경사에 밝고 또 글을 잘 썼다고 한다.
홍사구는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을 계기로 스승 안승우가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종사로 가담하여 안승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충주전투에는 신병으로 참전하지 못하였으나, 병이 낫자 제천의진에 참여하여 스승을 도왔다. 1896년 5월 25일[음력 4월 13일] 충청도 제천군 현우면 화산리 남산전투에서 장기렴(張基濂)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하면서 성이 함락되고 장졸이 모두 흩어졌으나, 홀로 스승이자 중군장인 안승우의 곁을 지켰다. 이에 안승우가 “나는 처음부터 죽기를 각오한 터이지만, 그대는 늙은 모친도 있고 아내를 거느린 처지가 아닌가? 얼른 피하라!”라고 여러 차례 피신을 권유하였으나, 홍사구는 “친구와 더불어 화를 당해도 부모가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피할 수 없는데 하물며 스승을 모시면서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선생께서 피하신다면 소생도 당연히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안승우가 홍사구를 돌려보내기 위해 서서히 걸어서 성을 나가다가 탄환을 맞고 주저앉자 홍사구는 적을 꾸짖으며 달려들다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1896년 5월 25일 그때 나이 19세에 불과하였다. 안승우와 홍사구의 최후를 목격한 관군들도 “지독하다. 안·홍 두 사람이여!” 하며 탄복하였다고 한다. 홍사구의 아내가 중군장 안승우가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내 남편이 죽었다”라고 하자, 모친이 남편이 죽은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지아비가 떠나면서 말하기를 “지금 의병은 성공할 가망이 없고 우리 스승은 반드시 구차스럽게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난들 면할 수 있겠소? 만약 중군(中軍)께서 죽었다는 말을 듣거든 나도 죽은 줄로 아오”라고 말하였다. 홍사구가 전사하자 부인 성씨(成氏)는 성심을 다해 시모를 모시고 양자를 들여 후사를 잇게 하여 주위를 감동하게 했다고 한다.
[묘소]
홍사구는 전사 후 충청도 청풍군 북면 위림리[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시 금수면 위림리] 갈마골에 묘소가 마련되었다. 이후 묘소를 제천 의림지 맞은편 산록으로 옮겼다가, 1984년 11월 제천시 고암동에 있는 의병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묘비명은 ‘순국선열홍사구의 묘’이다.
[상훈과 추모]
홍사구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1984년 홍사구의 고향에 의사남양홍공홍사구기념비가 건립되었다. 또한, 매년 10월 고암동 의병묘역에서 위령제가 거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