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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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鏞 |
영어음역 | Gim Yong |
이칭/별칭 | 명구(鳴九),육유재(六有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만기 |
성격 | 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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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
성별 | 남 |
생년 | 1657년 |
몰년 | 1732년 |
본관 | 광산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명구(鳴九), 호는 육유재(六有齋). 할아버지는 계암(溪巖) 김령(金坽)이고, 아버지는 김휘두(金輝斗)이다. 어머니는 영해신씨로 신건(申楗)의 딸이며, 부인은 진성이씨로 이성철(李誠哲)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용(金鏞, 1657~1732)은 일찍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스스로 학문을 탐구하여 경사(經史)와 성리서(性理書) 등에 두루 막힘이 없었으며, 특히 『심경(心經)』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에 독실하였다. 창설재 권두경(權斗經)과 친분이 있었는데, 권두경이 학문적 역량이 김용에게 미치지 못함을 자인할 만큼 그의 학문적 역량은 매우 높았다.
효성이 지극하여 생전에는 혼정신성(昏定晨省)과 동온하정(冬溫夏凊)을 몸소 실천하면서 어머니를 충심과 양지(養志)로 받들었으며, 사후에는 멀리 떨어진 무덤까지 가서 날마다 곡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집안에 거처할 때는 부부간에 서로 손님을 맞이하듯 공경하면서 50년간을 해로하였다. 아내가 임종할 즈음에는 살펴보고 나와서 “나는 일찍이 한 번도 아내의 발을 본 적이 없는데, 지금 드러내놓고 감추지 않으니 장차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튿날 과연 김용의 말대로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김용은 매사 재물보다는 의리를 더 중하게 여겼다. 안동시 와룡면 나소리의 마을지인 『나별지(羅別誌)』에는 “마을 어귀 신촌(新村) 앞산에 김용의 초당(草堂)인 육유재(六有齋)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육유(六有)란 중국 북송 때의 학자 장재(張載)의 ‘함양존성(涵養存誠)’의 뜻에서 취한 것이다. 장재는 『정몽(正蒙)』 유덕(有德)에서 “언어에는 가르침이 있고[言有敎], 행동에는 법도가 있게 하며[動有法], 낮으로는 공부함이 있고[晝有爲], 밤으로는 깨달음이 있으며[宵有得], 숨 한 번 쉬는데도 함양하고[息有養], 눈 깜짝하는 순간에도 마음을 간직하라[瞬有存]”고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육유재집(六有齋集)』이 있다.
[묘소]
안동에 위치한 동막산(東幕山)에서 장사 지냈다가, 와룡면 오천리 현동으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