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A0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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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임재해 |
하회에서 큰 종가와 작은 종가인 양진당과 충효당 못지않게 솟을대문을 세우고 아흔아홉 칸의 대저택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고가가 마을 북쪽에 있는 북촌댁(중요민속자료 제84호)이다.
본채가 불타 버린 남촌댁과 함께 북촌댁은 하회의 아랫마을과 윗마을 또는 남촌과 북촌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동쪽 방향으로 서 있는 북촌댁의 솟을대문은 하회에서 가장 우뚝하다고 할 정도로 규모가 웅장하다. 북촌댁은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로 이루어진 본채, 그리고 별당채와 사당이 별도로 있다. 대문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고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광을 두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사랑마당이다. 마당 오른쪽에는 별당채가 있으며,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대칭으로 놓이면서 부속 건물이 좌우에 이어져 ㅁ자 모양을 이룬다.
북촌댁은 처음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 학서(鶴棲) 류이좌(柳台佐)의 아버지 류사춘(柳師春)이 1797년(정조 21)에 작은 사랑채와 대문의 좌우 양편에 이어서 지은 행랑을 처음 지었다.
후에 석호 류도성(柳道性, 1823~1906)이 지금의 화경당을 지었다.
석호가 건물의 증축을 준비하면서 베풀었던 인심과 선행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귀감으로 여겨진다. 석호는 집을 증축하기 위해 춘양목을 강변에 쌓아두고 건조하고 있었다. 어느 날 광덕에 조문 다녀오던 일가 수십 명이 탄 배가 전복되자, 이들을 구하기 위해 재목 일부를 강물에 뗏목으로 밀어 넣어 사람들을 구하고 나머지는 불을 질러 어둠을 밝혀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이후 어렵게 재목을 다시 구해 지금의 집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없었다면 북촌댁의 건립 연도는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
북촌댁의 인심을 엿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이야기는 대추나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심이 좋은 집 주변에는 대추나무가 잘 자란다고 한다. 인심이 좋다고 소문난 북촌댁에는 원래 대추나무가 많아서, 가을이 되어 대추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면 주민들이 마음껏 대추를 따갈 수 있도록 했다 한다.
남촌댁은 북촌댁과 함께 하회마을의 아랫마을과 윗마을, 또는 남촌과 북촌을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형조좌랑을 지낸 류기영이 1797년(정조 1)에 세운 남촌댁은 1954년 화재로 인해 안채와 사랑채가 소실되어 지금은 문간채와 별당, 사당만 남아 있다.
남촌댁은 골목 안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으나 소실되고 남은 부분 가운데 담장 곁으로 뚝 떨어져 벽돌로 쌓은 굴뚝이 눈에 띈다. 이 굴뚝을 보면 불에 타기 전 남촌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지금 남촌댁 사랑채 터에는 강 건너에서 이전해 온 백율원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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