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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A020104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임재해

하회를 대표하는 인물이 겸암 류운룡서애 류성룡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각각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기르기 위해 세운 것이 겸암정사(일명 겸암정)과 옥연정사(일명 옥연정)이다.

겸암정사옥연정사는 우뚝 솟은 부용대를 마주보고 자리 잡고 있다.

부용대를 마주보고 왼쪽에 자리 잡은 겸암정사는 낙엽이 진 겨울 한 철을 제외하고 여간해서는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겸암정사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이 1567년(명종 22) 봄에 건립하여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던 곳으로, 몸을 쉬며 풍광을 즐기기 위해 마련한 예사 정자와는 다르다.

겸암정사겸암의 사설 교육장이라 해야 더 걸맞을 정자로서 서당의 구실을 적극적으로 담당했다. 서애 류성룡은 이 겸암정사를 두고 이런 시를 읊었다.

형님께서 남기신 이 정자

옛적에도 겸암이란 이름 있었네

섬돌가에 맑게 드리운 대나무 그늘

뜨락에 가득히 피어 있는 매화

노니신 그 자취마다 화초가 어울리고

신선처럼 다닌 길에 흰 구름이 이는구나

돌이켜보면 한갓 눈물이 고이느니

강물도 밤에는 소리 내어 예는구나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1586년(선조 19)에 세운 옥연정사는 부용대를 마주보았을 때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다.

화천이 마을을 시계 방향으로 휘감아 돌다가 방향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곳에 옥소(玉沼)가 있는데, 이 소의 남쪽에 있으므로 소의 맑고 푸른 물빛을 따서 옥연정사라고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서애옥연정사에서 임진왜란 회고록이라 할 수 있는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

류성룡은 당초 이 정자를 짓고자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탄홍(誕弘)이라는 중이 자청하여 10여 년 동안 곡식과 포목을 시주하여 완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애옥연정사에서 읊은 칠언절구(七言絶句)를 통해서 옥연정사의 정서를 공감할 만하다.

버선발로도 스스럼없는 길

강 위를 날아간 구름이 사라진 하늘은 가을

마름꽃은 뜯어도 드릴 이 없어

해거름 아득한 물길 한갓된 시름

겸암정사옥연정사는 인가와 완전히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길이 좁고 위험하여 함부로 접근하기도 어렵다. 겸암서애는 인적이 끊어진 숲속에서 자연과 교감하는 가운데 마음을 닦고 도학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겸암서애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는 형제바위와 양쪽 정자를 이어주는 토끼길을 보고 있으면, 형제의 정자가 부용대를 가운데에 두고 나란히 자리 잡은 것이 우연은 아닌 듯싶다.

겸암정 앞에는 강물을 가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형제바위[立巖]가 보인다. 형제바위는 큰 바위 옆에 작은 바위가 나란히 있는 듯한 형상인데, 사람들은 이 바위를 겸암 류운룡서애 류성룡의 형제애를 상징한다고 말하고 있다.

마을에는 겸암서애 형제의 후손들 관계가 소원해지면 큰 바위와 작은 바위 사이가 벌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지금까지 한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겸암·서애 형제 후손들의 우애와 심성이 형제바위를 통해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겸암서애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마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겸암정옥연정을 잇는 토끼가 지나다닐 만큼 좁은 토끼길이 부용대 벼랑 끝에 나 있다. 이 길로 겸암서애가 서로 안부를 전하기 위해 오갔다고 한다. 한 발을 내딛기가 아슬아슬한 그 길을 하루를 멀다하고 오갔다고 하니, 그들의 우애를 짐작할 만하다.

[정보제공]

  • •  김수갑(여, 1934년생, 하회리 거주, 일명 춘양댁)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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