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A03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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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재해 |
오늘날 종가의 전통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하회마을 충효당에는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의 전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풍산류씨 서애파 종부 최소희 할머니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최소희 할머니는 스무 살 때 하회마을로 시집을 왔다. 시집을 오기 전 할머니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한국전쟁으로 시국이 혼란스러워지자 고향인 경주로 돌아갔는데, 고향집에 내려와 머무는 사이에 혼사가 이루어져 하회마을 충효당 종부가 된 것이다.
최소희 할머니는 어렸을 적 “서애 종손 할래? 경상감사 할래?”라고 하면 “당연히 서애 종손하지”라는 이야기를 들을 적이 있었단다. 그래서 당시에는 서애 종손이 지금의 경북도지사보다 더 좋은 자리인 줄 알았다.
당시 최소희 할머니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종가는 그저 제사가 많고 시부모님과 시조부모님 등의 어른들을 모시고 살아야 하며, 경제적으로도 어렵다고 알 때였다. 하지만 풍산 미동이 친정이었던 할머니에게 들었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종부로서 해야 하는 일들을 배우고 익혔다. 최소희 할머니의 할머니는 항상 “같은 양반이라도 잘 살고 못 살고를 가려서 사람을 대하지 마라.”고 당부했었다. 경제적인 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최소희 할머니는 시집오기 전 할머니의 가르침을 받아서인지 시댁식구는 물론 일가친척들과 감정적으로 부닥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부리는 사람들이 있어 직접 밥을 짓는 일도 드물었고, 같은 또래 여성들이 한 번쯤 겪는다는 시집살이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자로 태어나 서애 종부로 산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최소희 할머니는 마음을 다해 조상을 모시는 제사와 종가에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종가는 손님이 북적북적해야 좋은 것이라며, 팔십이 넘은 나이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 종부로서 도리를 다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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