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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련오계의 견인적 인물, 김봉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C010202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미영

김봉조(金奉祖)는 1572년 한양 장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친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장남, 곧 팔련오계(八蓮五桂)의 맏형으로 태어났다.

1601년 30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42세 되던 해인 1613년에 문과급제를 하였다. 김봉조는 효심이 지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사시 합격을 한 이듬해에 부친이 세상을 뜨자 묘소 옆에 여막을 지어 3년상을 치르는 동안 삭망제를 지내기 위해 종택을 방문할 때 외에는 상복을 벗거나 여막을 나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부친 김대현이 세상을 뜰 때 김봉조는 31세였으며, 막내 아우 김숭조는 겨우 5세였다. 김봉조는 이 때부터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우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오미마을 팔련오계(八蓮五桂)를 배출하는 데 견인적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김봉조류성룡(柳成龍)으로부터 글을 배웠으며, 지금의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창건하는 일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흥미롭게도 문과급제를 하고 나서 부임한 벼슬이 단성현감이었는데, 이곳은 그 옛날 부친 김대현이 다스렸던 고을이었다. 이런 연유로 김봉조가 부임지로 길을 떠날 때 모친 전주이씨는, “단성은 너의 아버지께서 다스렸던 고을이다. 그러니 더더욱 조심하여 아버지의 청덕(淸德)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단성현감으로 부임한 김봉조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들의 고달픔을 구제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으며, 노인들을 초대하여 양로연을 열어 시름을 달래 주기도 하였다.

벼슬로 인해 외지생활을 주로 했던 김봉조는 편지를 이용하여 자녀교육이나 집안 살림 등에 관한 훈계를 하곤 했다. 다음은 장남 김시종(金時宗)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편지가 와서 너와 아이들이 모두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다. 위로가 되고 또 위로가 된다. 네가 열심히 글을 읽으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어찌 좋은 소식이 아니랴? 그러나 시력을 해치고 또한 심신을 허비할까 두렵다. 너는 어찌 늙은 아비의 뜻을 생각지 않고 이러한 데에 마음과 몸을 수고롭게 하려고 하느냐. 배불리 먹고 편안히 지내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도 역시 대단히 옳지 않은 일이다. 모름지기 도연명과 유종원의 오언시, 이백과 두보의 장편 및 주렴계와 정호·정이 등 여러 사람의 시를 읽되 시간을 정하여 많이 읽으려고 욕심내지 말고 매일 두어 편을 읽어 때때로 읊조린다면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눈병을 다스리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되지는 않겠느냐?

아들의 편지를 읽고는 객지생활에 더없는 위로가 되었다는 아버지 김봉조. 참으로 감성이 넘쳐나는 답장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아들의 시력을 걱정하여 일정 시간을 정해 두고 규칙적인 독서를 하도록 권하는 모습 역시 정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아울러 부친 김대현의 3년상을 치르는 동안 여막살이를 했을 정도로 조상에 대한 향념(向念)이 두터웠던 김봉조는 조상제사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리하여 편지를 통해 ‘제사절목’이나 제물의 종류와 숫자에 대한 지침을 내리기도 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사절목(祭祀節目)

해마다 토지에서 생산되는 곡식에서 가을이 되어 곡식이 익으면 풍년이면 30섬, 평년이면 25섬, 흉년이면 20섬을 특별히 창고에 간직하여 두었다가 제사 때에 그 4분의 1을 제사용으로 쓰도록 하여라. 고기값은 노비들이 바치는 것과 집안에 갖추어 두고 제사 때마다 쓰는 포목 세필을 쓰고, 콩 2섬, 찰벼 2섬, 실과 10말, 국수 10다발도 또한 특별히 간직하였다가 제사 때에 쓰게 할 것이다. 설·동지·삭망과 명절의 차례는 자기 가정의 형편에 따라서 지내되 정성을 다하도록 하고, 술 담글 쌀은 따로 간직한 곡식 중에서 알맞게 덜어내어 쓰도록 하여라.

-제물품수(祭物品數)

한 신위마다 제사상은 한 탁자로 함께 하되 밥과 국은 각각 한 그릇, 국수와 떡도 각각 한 그릇으로 하고, 탕은 다섯 가지, 적(炙) 한 그릇, 어육은 각각 열다섯 꼬지, 과육 한 그릇, 실과 네 가지로 하여라.

자신이 객지에 있는 동안 행여 조상제사를 소홀히 지낼까 염려되어 그야말로 세세한 지침과 항목들을 일러주는 등, 일상적 삶에서 감성 넘치는 가장(家長)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였지만, 불의 앞에서는 거침없이 맞서는 강단(剛斷)을 지니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항간에서는 “간당(奸黨)의 부당함에 대해 하도(下道)에서는 정한강[鄭逑]이 맞섰고, 상도(上道, 영남 북부)에서는 김학조가 맞섰다.”라는 언설이 회자되기도 했다. 이후 김봉조는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친 뒤 한양에서 눈을 감았다. 추원사에 부친 김대현을 비롯하여 형제들과 함께 배향되어 있으며, 영주 구호서원(鷗湖書院)에 부친과 함께 모셔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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