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인조 임금이 탄복한 인재, 김숭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C010206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미영

김숭조(金崇祖)는 1598년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 8남으로 태어나 5세 때 부친을 여의고 큰형인 김봉조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였다. 1624년 27세 되던 해에 진사시에 합격을 하고 나서, 형들의 권유로 대과를 목표 삼아 성균관에 유학했으나 2년 뒤 어머니가 숨을 거두자 낙담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모친의 3년상을 마치고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 성균관에서 대과 준비에 전념하여 1629년 32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모든 급제자들이 임금을 알현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김숭조를 대면한 인조는 단정한 용모와 행동에 크게 탄복하여, 어전(御前)으로 불러들여 가문의 내력 등을 물었다. 그리고 8형제의 업적을 듣고는 “과연 그대 가문은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로구나.” 하고는, 당시의 마을이름인 ‘오릉(五陵)’을 고쳐서 ‘오미(五美)’라고 하라며 새로운 지명을 하사하였다.

아울러 부친 김대현에게는 이조참판을 증직하고, 모친 전주이씨에게는 정부인이라는 직함을 내려주었다.

김숭조는 할아버지 김농(金農)의 취향을 물려받았는지 매화를 유달리 가까이 하였다. 그리하여 집안 가득 항상 매화를 심어두고 해마다 섣달이 되면 반드시 꽃을 피우도록 정성을 다해 돌보았으며, 친구들을 초대하여 함께 감상을 하고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다음은 김숭조가 남긴 매화시이다.

시가 없이는 바라볼 수 없고

술이 없이는 가까이 할 수 없구려

향기는 문을 닫으면 진하게 풍기고

그림자는 밝은 달과 함께 차갑게 비치네

모습에서는 매우 친숙함을 느끼지만

그 정신은 도리어 범할 수 없구나

모진 비바람은 근심이 아니고

다만 장차 저무는 봄이 두렵다네

시와 술이 없이는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매화. 비바람이 아니라 매화꽃이 지는 봄을 두려워하던 김숭조. 그야말로 매화를 사랑하는 극진함이 엿보인다.

김숭조는 문과급제를 하면서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고, 3년 후에는 승정원주서 겸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날마다 경연(經筵)에 들어가 인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유행했던 천연두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에 인조가 친히 내의(內醫)를 보내어, “내가 그대의 옥 같은 얼굴을 사랑하니 부디 잘 치료해서 우리 주서(注書)의 낯이 얽지 않도록 하거라.” 하는 당부까지 했으나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1632년 향년 35세였다. 김숭조는 추원사에 부친을 비롯한 형제들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