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C020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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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미영 |
「세덕가」는 유교적 전통과 종족의식이 강한 동성마을에서 주로 전하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가사작품을 말한다. 오미리의 풍산김씨 집안에서 전해 오는 「세덕가」를 지은 사람은 김병철(金秉喆, 1881~1951)이라고 한다. 김병철은 김봉조(金奉祖)의 후손으로, 당대 손꼽히는 한학자였으며 숭조의식도 각별했던 것으로 전한다.
「세덕가」는 김병철이 40세 되던 해인 1920년에 작성되었으며, 시조 김문적에서 15세 김영조를 거쳐 25세인 자신의 부친까지 총 25명에 달하는 직계조상들의 내력을 기록하고 있는 이른바 전형적인 직계손형 「세덕가」이다. 다음은 「세덕가」의 서문 대목이다.
어화 후생들아/ 우리세덕 들어보소
신라의 종성으로/ 풍산에 이관하니
판상사공 큰문호를/ 좌윤공이 중흥하사
여조(麗朝)에 현달하나/ 보첩이 소략하니
사적을 어이아랴/ 아조(我朝)로 이를진데
풍산김씨의 연원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신라의 김씨가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살다가 시조 김문적(金文迪)이 풍산백에 봉해짐으로써 풍산을 본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김문적은 고려 고종 때 인물로 판상사를 역임했으며, 그 외 묘소 등의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김문적의 증손인 김연성(金鍊成)에 이르러 경주에서 풍산 석릉촌으로 이거하고 오미동에 별서를 두었다고 한다.
풍산김씨 중흥 인물로 묘사된 좌윤공은 김안정으로 김양진(金楊震)의 고조부이다. 김안정에게는 아들 형제가 있었는데 오미동 풍산김씨는 차남 김자순(金子純)의 후손들이다. 이로써 김안정은 오미동 풍산김씨에게는 혈통적으로 중흥 인물이 되는 셈인데, 묘소는 경기도에 위치하고 있다.
김안정의 아들 김자순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개성에서 한양으로 이주하여 장의동에 정착한 것으로 전한다. 이후 그는 형 김자량이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자 화를 피하기 위해 별서가 자리한 오미동으로 옮겨와서 살다가 눈을 감는다.
묘소는 오미동에 자리하고 있다. 다음의 대목은 허백당 종가를 창설한 김양진에 관한 내용이다.
15대조 허백당공/ 정직무사(正直無邪) 하신고로
소인에게 제함(擠陷)되여/ 동국명현 사적 중에
청백재상 네 글자로/ 만세유전(萬世遺傳) 하셨드라
정부인 양천허씨/ 찬성공 증녀시오 장사랑공 영녀시라
김양진은 김휘손과 여흥민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1489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7년 31세의 나이로 문과급제를 하였다.
1504년 홍문관부수찬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묘호(廟號)를 추존하려고 할 때 이를 반대하여 예천으로 귀양 갔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난 적도 있다.
김양진은 허백당이라는 그의 호(號)처럼 40년에 걸친 오랜 벼슬생활을 하면서 선정을 베푸는 덕치가로 명성이 높았다. 때로는 자신의 녹봉을 털어 백성들의 가난을 구휼하기도 했는데, 이로써 중종 때는 청백리로 추대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세덕가」는 주로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작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세덕가」의 서두 부분은 ‘어화 딸네들아’·‘누의와 여아들아’ 등으로 시작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반면 풍산김씨 「세덕가」는 ‘어화 후생(後生)들아’로 시작되는데, 이는 곧 그 대상이 남녀 후손 모두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아울러 여타 가문에 비해 풍산김씨 「세덕가」는 비교적 간결한 편인데, 이는 조상들에 대한 칭송은 극히 억제하고 혈통의 연원을 밝히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여타 작품과 달리 풍산김씨 「세덕가」는 조상의 덕업을 칭송하는 주관적 기술보다는 생전의 행적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조상들의 행적 중에서도 묘소의 위치와 기일(忌日) 등을 첨가하는 보편적 경향과 달리 이를 생략하고 있으며, 대신 부인의 혈통적 내력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조상의 치적을 드러내는 과시적 목적보다는 혈통의 근원을 후손들에게 상세히 알려주는 교훈적 목적을 중시한 결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풍산김씨 「세덕가」에서는 거론되는 조상마다 ‘15대조 허백당공’이라는 식으로 몇 대조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사실인데, 이는 여타 가문의 작품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형식이다. 비록 작자 중심의 세대(世代)이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서도 약식 족보 혹은 세계보(世系譜)로서 기능하는 풍산김씨 「세덕가」의 교훈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