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D01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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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827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정현 |
열녀각은 금소에서 옹천강씨 집안으로 시집온 예천임씨 열녀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1904년 고종이 내린 정려각이다.
열녀 예천임씨는 남편 강종헌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정성으로 간호를 하였으나 운명 직전에 이르자, 자신의 무명지를 깨물어 남편에게 수혈함으로써 3개월간 더 살게 하였다. 하지만 남편은 끝내 운명했는데, 그 때 임씨 부인의 나이는 22세였다고 한다. 강신중 옹이 집안에서 전해 오는 임씨 부인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그 열녀 사기(史記)가 전부 있었는데, 6·25동란에 싹 처대부렀어요.(불에 타 버렸어요) 처대부고. 그 전에는 또 유림에서 모에가주고 저 열녀각(烈女閣)을 짓는 거게든요. 지가주설라 그게 바로 임필대(林必大) 씨라꼬 반다시필(必), 큰대(大) 자래요.
그래가주 그분이 그라문, 우리한테는 그 저 종(宗) 짜이께네 증조, 종증조래요. 종증존데, 그 분 인제 젊을 때 연세가 스물 둘에 고마, 저- 참 과부가 됐는데. 이래가주 글 때 딸을 하나, 딸 하나 있었어요. 있었는데, 여 글 때 참 여기서 바로 저 앞에 [마을 안쪽을 가리키며] 저기 살았는데.
그래가주, 그 분이 인제 늘 시집도 안 가고, 글 때는 참 거 시집도 잘 가지도 못했지만, 멋한 이는 개가(改嫁)하는 이는 많엤그던요. 글치만 그래 인제 그 개가 안하고 딸만 믿고 사이, 아들이 있으만 믿고 사는 거는 또 덜하지만, 딸만 믿고 후손도 없는데 살았거던요. 사이 한 번은 인제 거 임씨네 댁에서 말이래. 그 참 친정댁에서 불러요. 그래, ‘그 부친이 편찮다’ 그고서 불렀다 말이래.
글 때 동짓달이래 글 때 동짓달이이 마구 여 얼었는 거, 얼음을 깨고 건네야 돼. 글 때 머 다리가 있었니껴 머. 거 여여 요새 거 저 선어대 쏘 있는 데, 베리 끝이래가 사람 제구(겨우) 붙어 댕겼는 모얘이래. 낮에도 제구 댕겼는 모얘이래. 글코 또 개목물을 건너야 되지. 요새 거 저 법흥동 말이래, 거 건너야 되지. 또 거 고 앞에 가다가 거 베리 끝에 가가주고 거가 저게 가잖니껴? 바로 솔매 옆에 거 건너야 되지. 또 저- 금소 가만 거 신덕 앞에 그 물 건너야 되지요.
그래 물을 건너고 언나(아기)를 업고 물을 건너가주고 집이 갔단 말이래. 가이께네, 어르이 웃고 나오거든요. 나오신다고, 웃고 나오시이께네, 그래 거 집에 저 어른도 편찮다 카디 웃고 나오이 이상해 가주고 물었단 말이래. 물으이께네, ‘내가 아픈 게 아이고, 니 그래 살어 멀하노 말이래. 아들이라도 있는 거 긑으만 모르지만 아들도 없는데, 그래 산여는(살며는) 머 거 소용없잖나 고마. 니 어디 혼처(婚處)가 옳은 데 나와나 인제 그 개가 시킬라고 한다.’
그리이, 그 길로 고마 돌아섰어요. 금소 육십 리 아 업고 걸어 가만 글 때는 캄캄했단 말이래. 어둡게, 여자 걸음으로 말이래, 동짓달에. 어둡단 말이래. 캄캄한데, 집이서는 고마 아도 없고 그르이, 딸 하나뿐이고, 아주 시집간 줄 알았어요. 집이서도 그리 부르이께네 말이래. 그래 간 줄 알았는데, 새박녁에 그 샐라 칼 때, 날 새자마자 할 때 또 이분이 돌아왔어요. 돌아와가 주고, 오이께네 얼라 업고 들오이께네 말이래, 그 열녀가 그래 보통 거거 보통 여 봉화길 긑고 팬한 길도 그런데, 그 물을 몇 낱 건너가주, 또 배리끝을 건너가주고 그래 걸어가 주고 육십 리만 가도 걸지도 못할 껀데, 육십 리 되돌아갔다가 또 돌아왔다는 게, 그게 참 대단찮으이껴? 그 물골새 해가주고.
그래가 주고 사유(事由)는 있었는데, 사유는 우리들도 그 모르지요. 모르는 게 왜 모르노 그러믄, 사적(史蹟)을 전부 태와 부렀으이. 고른 건 그저 말로만 전해 오는 거만 들었지. 그래가주 광무(光武) 몇 년에 여기 가믄, 광무 몇 년에 인제 여 나라아서 내려왔어요, 열녀라꼬. 그래 내려왔는데, 그 나라에서 참 내린 그 열녀래요.”
강신중 옹의 이야기처럼 임씨 부인은 평생을 절개를 버리지 않고 수절하였고, 이에 사림에서 공의하여 조정에 상소하였고, 왕의 하명으로 정려각을 건립하게 되었다. 본래 열녀각만 있었고 비는 없었으나 강씨 문중의 발의로 1994년 열녀비를 제작해서 열녀각 안에 안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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