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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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印潑 |
이칭/별칭 | 공근(公瑾)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570년 - 인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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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인발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움. |
활동 시기/일시 | 1605년 - 인발 증광시 병과 급제 |
추모 시기/일시 | 1605년 - 인발 공신녹권을 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인발 병자호란에 참전 |
몰년 시기/일시 | 1636년 - 인발 사망 |
거주|이주지 | 거주지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죽림리 |
묘소|단소 | 인발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교동 |
대표 관직 | 선략장군|훈련원정 |
[정의]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활약한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무신.
[개설]
인발(印潑)[1570~1636]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받았고, 병자호란 때 전투 중 전사하였다. 인발의 묘가 조성된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에 교동 인문의 집성촌이 4백 년간 계승되어 오고 있다.
[가계]
본관은 교동(喬桐)이다. 아버지는 정략장군(定略將軍) 인언광(印彦光)이다.
[활동 사항]
인발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문신은 편안할 때 책을 벗삼지만, 국난이 닥쳤을 때는 책을 덮어 두고 창칼을 들어야 한다.”라며 왜적을 무찌르는 데 앞장섰다. 인발이 날쌘 군사 기백을 이끌고 항시 적을 후방에서 괴롭히니 왜적들도 싸움에 패하면 “인발의 군사냐?”라고 할 정도로 크게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의 공을 인정받아 정난원종(靖難原從) 2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왜적이 물러가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인발이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죽림리 집에 거주하고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발은 그 소식을 듣자 그 길로 한양(漢陽)으로 올라가서 군사를 모으려고 하였으나 한양의 인심이 소란하여 군사를 모을 수가 없었다. 인발은 그 길로 전라병영으로 내려가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1586~1642]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인발이 수원 광교산전투에서 용전하다 전사하자 인조(仁祖)[재위: 1623~1649]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발(印潑)이 죽다니…” 하고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광교산의 중이 공의 명패를 보고 부고를 알려서 가족이 시신을 수습하러 갔는데 “열기가 오히려 늠름하고 얼굴과 눈이 살아 있는 것 같았으며 입었던 배자(褙子) 도 단정히 그대로였다”고 한다. 이후 훈련원정[정3품 훈련원의 벼슬]에 증직되었다. 인발의 묘는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재동에 있다. 그 주변에 4백여 년을 계승하여 내려오고 있는 교동 인문[그곳에서는 ‘오야골 인씨’라고 부른다고 함.]의 집성촌이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의 공을 인정받아 정난원종 2등 공신에 녹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