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6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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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思九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정전리 407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을경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7월 27일 - 김사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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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김사구 3월 독립 만세 운동 계획 |
몰년 시기/일시 | 1948년 1월 5일 - 김사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김사구 대통령 표창 추서 |
출생지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정전리 407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3월 독립만세운동 주도 |
[정의]
일제 강점기에 활동하였던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사구(金思九)[1879~1948]는 보령 출신으로, 1919년 3월 10일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성연리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활동 사항]
김사구는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보령 지역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봉화를 올리고 만세 운동을 전개하고자 계획하였다. 김사구는 1919년 3월 10일경 같은 마을 친구인 강영국(姜永國)[1878~1946]에게 자신들이 주동이 되어 보령 지역에서 만세 운동을 펼칠 것을 설득하였다.
김사구는 3월 17일에 청소면 성연리의 김재두(金在斗)·한기석(韓基錫)·이병철(李秉喆)을, 3월 25일에 청소면 정전리의 박제건(朴齊乾)을, 3월 27일에 청소면 성연리의 임경진(林庚鎭)을, 3월 30일에 청소면 성연리의 고광춘(高光春)을 차례대로 방문한 후 꽃놀이를 가장하여 4월 10일 신태중(申泰重)의 집에 모이자고 주동하였다. 약속 날짜인 4월 10일 신태중의 집에 8명이 모이자, 김사구와 강영국은 “다른 군에서는 독립운동을 위하여 산에 봉화를 올리고 여러 사람이 모여 만세를 부르는데 보령에서는 아직 운동에 착수하는 자가 없으니 우리가 주도하여 궐기하자.”라고 하면서 회합한 인사들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우선 보령리 진두산(陳頭山)에 봉화를 올리고 독립 만세를 외친 후 청소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면 직원들도 시위 운동에 참가시키자.”라고 독려하였다. 그러나 박제건과 고광춘이 계획에 반대하였고,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계획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4월 12일 체포되었다.
김사구와 강영국은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8월 7일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사구의 공훈을 기려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