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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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Temple Site in Neungsan-ri, Buye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5-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박중환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백제 왕실 사찰 터.
[능사,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다]
부여 능산리 사지(扶餘 陵山里寺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의 부여 왕릉원 서쪽 가까이에 있다. 부여 능산리 사지는 백제 사비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외곽성인 부여 나성의 동쪽에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부여 사비 시대의 외곽성을 벗어난 바로 바깥에 있는 셈이 된다.
충청남도 부여군에서는 원래 부여 왕릉원에 찾는 관람객들의 주차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에 해당 지역에 대한 유적의 유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의 발굴 조사를 1992년부터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진행하면서 사찰 터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었다. 부여 능산리 사지에 대한 조사는 국립부여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등 여러 조사 기관이 참가하여 진행되었다. 1993년에 진행한 제2차 발굴 조사에서 국보인 백제 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으며 1995년 제4차 발굴 조사에서는 목탑 터의 심초석 위에서 국보인 부여 능산리 사지 석조사리감이 발견되었다. 부여 능산리 사지 석조사리감에 새겨져 있는 명문(銘文)의 내용을 통하여 부여 능산리 사지에 있었던 사찰이 백제 창왕[위덕왕] 13년인 567년에 왕실의 주도로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부여 능산리 사지는 부여 능산리 사지 석조사리감에 새겨져 있는 명문뿐만 아니라 발굴 조사의 다양한 결과들에서도 백제 왕릉군으로 널리 알려진 인근의 부여 왕릉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 터로 생각된다. 이 때문에 부여 능산리 사지에 있던 절은 부여 왕릉원에 묻힌 백제 왕들의 영혼을 달래고 왕릉을 관리하기 위한 사묘(祠廟)의 기능을 수행한 국가 사찰이었던 곳으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위덕왕 대에 만들어졌다고 구체적으로 제작 시기를 적은 명문 기록의 내용을 볼 때, 관산성에서 세상을 떠난 성왕(聖王)의 명복을 비는 기능을 주로 수행하는 기원 사찰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부여 능산리 사지에 있었던 절을 ‘능사(陵寺)’라고 부르고 있다.
[능사는 어떤 모습일까]
부여 능산리 사지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 배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계곡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을 관리하기 위하여 사역의 좌우에 동쪽 배수로와 서쪽 배수로를 만들어 놓은 것이 확인되었다. 서쪽에서 경내로 진입하는 도로의 중간 부분에서는 서쪽의 배수로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길을 건너기 위한 돌로 만든 다리도 확인되었다. 중문의 남쪽 공간에는 다양한 재료와 형식으로 설치된 수로와 물을 모아 두었던 곳으로 보이는 집수조, 우물 등 다수의 치수 시설들이 확인되었다. 사찰 외부에서 중문지를 거쳐 사역 중심부의 의례 공간으로 직접 연결되는 도로의 구조와 함께 계곡 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관리하기 위한 각종 치수 관련 시설들의 존재가 확인된 것이다.
사찰의 중심부에 자리한 목탑 터는 기초부가 이중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남쪽과 북쪽에 각각 계단 시설이 있었다. 금당 터는 목탑 터와 마찬가지로 이중 기단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구조와 규모를 가지고 있다. 강당 터는 길이가 37m나 되는 거대한 규모이다. 절터 안에서는 공방(工房) 시설이 두 군데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제3건물터의 목곽 수조(木槨 水槽) 안에서 백제 금동대향로가 발굴되었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백제의 높은 금속 공예 기술 수준과 예술적 역량이 집성된 수준 높은 예술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찰 내부 여러 도로의 노면은 잘 다져진 황갈색 혹은 적갈색 사질토로 포장되어 있었으며, 도로 가장자리에 작은 석열을 배치하여 도로의 경계를 표시한 부분도 있었다. 도로면의 하부에는 자갈돌이나 20㎝ 내외의 돌과 마사토를 섞어서 성토한 층이 발견되기도 하고, 저습지 구간에서 하부의 진흙층에 나뭇가지를 깔아 놓은 구조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는 도로 지반의 침하를 완화시키는 침하 방지 방법으로 사용된 건축 기법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능사에서 주목한 만한 유물은]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는 백제 금동대향로와 부여 능산리 사지 석조사리감과 같은 대표적인 유물 이외에도 와전류, 토기류, 금속류, 목제류 등 많은 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서쪽의 배수로와 중문 남쪽의 습지 하부에서 30여 점의 묵서를 가진 백제 시대 목간(木簡)이 발굴되었는데,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발굴된 목간들의 숫자는 2023년 현재까지 백제 유적에서 발굴된 백제 목간 가운데 가장 많은 수량이다. 목간들에는 묵서(墨書)뿐만 아니라 각서(刻書)로 된 기록들도 남아 있었다. 목간에 기록된 내용 가운데에는 각종 의례와 관련된 내용들과 불교 관계 기록들, 백제의 지방 행정, 관등의 명칭, 백제 시대 사람의 이름, 토지의 용도별 명칭 등을 나타내는 기록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발굴된 목간은 백제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능사를 창건한 배경은 무엇일까]
부여 능산리 사지에 있었던 사찰의 성격은 우선 유적의 입지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사비도성의 외곽성인 부여 나성의 바깥쪽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사비 시대 백제 왕들의 능이 모여 있는 부여 왕릉원의 지근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부여 왕릉원에 묻힌 피장자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1995년 발굴된 부여 능산리 사지 석조사리감은 사찰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냈다. 부여 능산리 사지 석조사리감의 감실 좌우면에는 예서체의 글씨로 한쪽에 10자씩 모두 20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측면: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좌측면: 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백제 창왕 13년인 567년에 매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라는 내용이다. ‘창왕’의 ‘창(昌)’은 백제 제25대 위덕왕의 휘(諱)이다. 이러한 명문 기록으로 부여 능산리 사지에 있었던 사찰이 위덕왕 재위 13년째인 정해년에 왕의 누이인 공주가 원주(願主)가 되어 무엇인가를 소원하며 세운 백제 왕실의 원찰(願刹)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리감에 남겨진 기록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찰을 세우고 탑 밑에 사리장엄구와 사리를 봉안하였던 당시의 왕 위덕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위덕왕이 사찰을 세울 당시에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위덕왕은 554년 관산성에서 신라와 싸우다 전사한 성왕의 아들이다. 『백제본기』라는 백제계 사서류를 토대로 쓴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성왕이 관산성에서 전사할 무렵 후일 왕위에 오르게 되는 창은 태자 신분이었다. 위덕왕은 국가 원로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대한 적극적인 군사 공격을 주장하고 전쟁을 주도하였다.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이 태자를 위로하러 나갔다가 오히려 신라군에게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는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위덕왕은 한때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자신의 과오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왕위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출가하려 하였으나, 귀족과 대신들의 반대로 출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 100여 명의 승려를 출가시켜 부왕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맡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발견된 명문 기록 내용과 인접한 부여 왕릉원과의 밀접한 관계 등을 고려하면 위덕왕 때 백제 왕실이 성왕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위하여 사찰을 세웠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능사의 절터에서는 적지 않은 숫자의 목간이 발굴되었다. 목간들 가운데에는 사찰의 운영과 관련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들도 있다. 왕실의 원찰이었던 절의 위상을 반영하듯 다른 사찰로부터 능사에 공양품을 보내면서 그 품목을 적은 내용도 있었다. “4월 7일 보희사에서 소금 2섬을 보냅니다(四月七日 寶熹寺 送鹽二石)“와 같은 묵서 기록이 그것이다. 또한 목간 가운데에는 전사자와 관련된 내용이나 장례 절차와 관련된 내용들이라고 생각되는 글자들도 발견되고 있다. ‘재배(再拜)’,‘죽음(死)’, ‘…한 사람의 모습이다. 모두 그것을 장례 도구 위에 그리도록 하라(…人行色也 凡作形之中尸具)’ 등의 묵서 기록들이 그러한 정황들을 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능사가 세워진 것은 성왕의 비극적인 죽음을 추모하고 그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능사에서 극락왕생을 빌어야 할 대상은 성왕 한 사람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왕이나 당시 태자였던 창을 따라 전쟁에 나갔다가 목숨을 잃은 군사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능사에서 발굴된 목간들에 보이는 장례나 죽음 관련 기록들은 성왕과 함께 전쟁에서 희생된 군사들의 사후 처리나 장례에 관련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능사는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명복을 비는 기능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 능산리 사지의 성격과 인근에 있는 고분군, 즉 백제 왕릉원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성왕이 세상을 떠난 뒤 무덤에 안장될 때까지 이루어진 빈장(殯葬) 절차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부여 능산리 사지에 있었던 건물이 성왕의 원찰로 지어진 사찰이 아니라 성왕의 시신을 모신 빈소(殯所)였을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또한 강당 터가 동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구조라든가 사찰 건물 내에 공방이 마련되어 있는 점, 백제 금동대향로에 도교적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부여 능산리 사지에 있었던 건물의 성격을 불교적 관점이 아닌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려는 견해들도 있다. 이러한 관점들을 수용해서 본다면 부여 능산리 사지에 있었던 건물의 성격을 성왕과의 관련성 속에서 이해하면서도 건물의 기능이 시기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겪었을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능사를 바로보는 세간의 평가]
능사, 즉 부여 능산리 사지는 유적의 지하 잔존 부분이 매우 잘 남아 있고, 출토 유물 역시 명확한 시대 편년이 가능한 명문 기록을 포함하고 있는 유적이다. 부여 능산리 사지의 구조에 대한 자료는 삼국 시대 건축은 물론 동북아시아 사찰 건축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백제의 대표적인 공예품이라고 할 수 있는 백제 금동대향로가 발굴되어 백제의 수준 높은 금속 공예 기술과 예술적 역량을 보여 준다. 목탑 터의 심초석에서 발굴된 부여 능산리 사지 석조사리감은 봉안되었을 사리장엄구를 잃은 상태로 발견되었지만, 새겨진 명문 기록을 통하여 567년이라는 사찰의 절대 연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와 함께 부여 능산리 사지의 건물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된 왕실의 기원 사찰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부여 능사는 6세기 후반의 백제 사찰로서 절대 연대와 사찰의 창건 동기를 확인할 수 있는 매우 드문 유적이다. 발굴된 유물의 면모를 살펴볼 때 능사는 660년 백제의 멸망과 함께 폐사되면서 기능을 잃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