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772 |
---|---|
한자 | 允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김기섭 |
[정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을 수도로 한 백제 사비 시기의 장군.
[가계]
윤충(允忠)[?~?]은 장군의 직책으로 부여에서 활동하였으나 성씨에 관하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활동 사항]
『삼국사기(三國史記)』 권28 백제본기에 따르면, 642년(의자왕 2) “8월에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品釋)이 아내, 자식과 함께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모두 죽이고 머리를 베어 왕도로 보냈으며, 남녀 1,000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 지방의 주·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이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000석을 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도 함께 죽임을 당하여 김춘추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권47 죽죽(竹竹)열전에는 내용이 조금 다르게 되어 있다. 신라의 김품석이 대야성도독으로 부임한 뒤 부하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를 빼앗은 적이 있다. 윤충이 거느린 백제군이 대야성을 공격하여 오자 옛일을 한스럽게 여기던 검일이 백제군에 내응하여 군량 창고를 불태워 성안을 어지럽게 하였다. 이에 김품석은 항복하면 살려 준다는 윤충의 약속을 믿고 죽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먼저 군사들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가 군사들이 백제의 복병에게 전멸하자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자결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