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8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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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階伯 |
이칭/별칭 | 계백(堦伯),해백(偕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김기섭 |
활동 시기/일시 | 660년 - 계백 오천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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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660년 - 계백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 |
추모 시기/일시 | 1957년 - 계백 삼충사 배향 |
묘소|단소 | 충곡리 - 충청남도 논산군 부적면 충곡리 |
사당|배향지 | 삼충사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대표 관직 | 달솔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의열사와 삼충사, 팔충사에서 제향하고 있는 백제 말기의 무신.
[가계]
계백(階伯)[?~660]은 조선 후기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이름은 승(升)이고 성씨는 백제 왕실의 성씨와 같았다”라는 기록이 있어 ‘계백’을 성씨로 보기도 한다. 계백의 조상은 개백현(皆伯縣)[현 경기도 고양시]을 근거로 삼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기이(紀異)」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조에는 ‘해백(偕伯)’으로 표기되어 있다.
[활동 사항]
660년(의자왕 20) 7월 초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 군대가 탄현(炭峴)을 넘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으로 향하고,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거느린 13만 대군은 백강(白江) 어귀로 진입하여 백제를 위협하였다. 당시 백제의 장군으로서 달솔(達率)이던 계백은 7월 9일 결사대 5,000명을 이끌고 황산벌로 가서 신라군과 4번을 맞붙어 싸워 모두 이겼다. 이로써 신라군은 당초 7월 10일 사비성 남쪽에서 당나라 군대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당시 16세의 어린 나이로 신라군의 부장(副將)이던 화랑(花郞) 관창(官昌)이 죽음까지 각오하며 백제의 진지로 달려 들어오자 포로로 잡은 뒤 돌려보내었다. 관창이 다시 도전하자 이번에는 계백이 잡아서 목을 벤 뒤 머리를 말안장에 매어 신라 쪽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곧 신라군이 화랑 반굴과 관창의 희생으로 사기를 되찾고 크게 반격하여, 마침내 백제군과 계백의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고 전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에 따르면, 계백은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하기에 앞서 “지금 국가의 앞날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이 적군의 포로가 되어 노비가 될지도 모르는데, 살아서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라고 말한 뒤 가족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당시 계백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충절을 강조하는 유교 사상이 이미 국민적 덕목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계백이 5,000명의 결사대를 지휘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는 계백이 백제 무왕(武王)의 후원하에 성장한 신흥 귀족으로서 의자왕의 측근 세력이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계백은 후대에 충절의 표상으로 추앙되었다.
[묘소]
계백의 묘소는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산4-2에 있다.
[상훈과 추모]
계백은 의열사(義烈祠)와 삼충사(三忠祠), 팔충사(八忠祠)에서 제향하고 있다. 1575년 건립된 의열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으며, 백제의 성충과 함께 흥수(興首)와 계백(階伯), 고려의 이존오(李存吾), 조선의 정택뢰(鄭澤雷)와 황일호(黃一皓)를 제향한다. 삼충사는 1957년 충청남도 부여군이 부여읍 관북리에 건립하였으며, 성충과 함께 흥수와 계백을 제향한다. 팔충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에 있는 백제 8충신 등을 모신 사당으로 1980년 부소산에 있던 삼충사의 건물을 옮겨 지었다. 충화면 팔충리에는 계백을 비롯한 백제 8충신이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충곡서원과 신곡리 충장사에도 제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