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14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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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광호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2년 - 「혈순당의 벽화」 한민에서 발행한 『여기가 부여다』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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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부소산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
채록지 | 쌍북리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누이|남동생|손님 |
모티프 유형 | 정절 |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서 혈순당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
[개설]
「혈순당의 벽화」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서 혈순당에 그려진 벽화와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혈순당의 벽화」는 1992년 한민에서 발행한 『여기가 부여다』에 수록되어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서 마을 주민이 구술한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내용]
옛날 백제 시대 부여의 부소산(扶蘇山) 뒤쪽에 우애가 두터운 한 남매가 살고 있었다. 남매는 일찍 부모를 여의었기에 생계를 유지하고자 누이는 들판에 나가 곡식을 가꾸었고, 남동생은 백마강(白馬江)에서 고기를 잡았다. 남동생이 고기잡이를 하며 한 젊은이와 친하게 지냈다. 남동생과의 인연으로 얼마 뒤 젊은이는 누이와 혼인을 약속하였다.
젊은이는 기골이 장대하면서도 꿈이 많은 인물이었으므로 넓은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를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누이와 약혼을 하고는 큰 고깃배를 따라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젊은이는 돈을 많이 벌어 돌아오면 혼인을 하자는 말을 남기고는 떠나 버렸다. 누이는 내키지 않았으나 젊은이의 소원이라 하므로 군말 없이 젊은이를 떠나보내고 평상시와 같이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젊은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젊은이와 함께 바다로 떠났던 선원에게 젊은이가 군산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풍랑을 만나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젊은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누이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으며, 그만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백마강에 뛰어내리고 말았다. 누이가 죽자 남동생도 슬픔이 너무 커서 부소산을 며칠 동안 헤매다 바위에 올라가 누이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에게 구출되어 죽지 못하였다. 남동생은 집에 돌아와 마루 벽에 누이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림을 완성하여 누이가 살았을 때처럼 그림에게 말을 거니 조금씩 슬픔이 잊혀져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젊은 사람이 찾아와 하룻밤 쉬어 가기를 청하여 남동생이 허락하였다. 이튿날 아침, 남동생은 일찍 쳐 놓은 그물을 보러 나가야 하므로 손님이 깨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손님은 해가 뜨자 일어나 집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마루에 그려진 여인의 초상을 보았다. 손님은 그림이 정말 아름다워 한눈에 반하였다. 그래서 마치 살아 있는 여인에게 구애를 하듯이 지긋이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잠시 후 여인의 입술에서 피가 흐르더니 마루가 진동하다 집이 흔들리고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깜짝 놀라 합장을 하고 잘못을 뉘우치자 그제야 집이 조용하여졌다. 이후 손님은 다시 근처를 지나는 길에 찾아와 남동생에게 그림의 내력을 들은 후 누이의 혼을 위한 진혼굿을 하여 주었다. 그러고는 남동생의 집에 ‘혈순당’이라는 현판을 걸어 주었다. 이듬해부터 혈순당에서는 매년 진혼굿이 베풀어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혈순당에서 하는 굿의 이름을 ‘혈순당 당제’라고 불렀다.
[모티프 분석]
「혈순당의 벽화」의 모티프는 ‘정절’이다. 혼인을 약속한 상대에 대한 정절을 죽어서도 지킨 여인의 모습을 통하여 여인의 정절이라는 덕목을 가치 있게 여기던 당대인들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죽은 여인의 한을 달래기 위한 당제가 백제 여인들의 정절을 높이 사는 당제로 받들어져 온 데에서도 당대인들의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