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794 |
---|---|
한자 | 李壽海 |
이칭/별칭 | 일여(一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조선 후기 천안에 우거한 문신·학자.
[개설]
이수해(李壽海)[1693~?]는 영조 재위 기간 주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근무하면서 강직한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행(學行)으로 네 차례에 걸쳐 참봉에 제수되었다.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일여(一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동명(李東溟), 할아버지는 이정화(李鼎華)이다. 아버지 이광의(李廣義)와 김만증(金萬增)의 딸인 어머니 광산 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생은 1745년(영조 21) 문과에 급제한 이덕해(李德海)이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홍우제(洪禹齊)의 딸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후손인 김주국(金柱國)의 딸 의성 김씨(義城金氏)이다.
[활동 사항]
1725년(영조 1)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27년(영조 3) 실록청의 등록랑 역할 수행과 관련하여 총재관 이광좌(李光佐)의 요청으로 진도에 유배될 때의 직책이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라는 기사를 볼 때, 『정조실록(正祖實錄)』의 편찬 시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가의 공적 기록을 담당하는 승정원의 주서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실록 편찬 시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관직 생활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수해는 1731년(영조 7) 해배되어 승정원의 주서로 복직되었고 이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사헌부 지평 재임 시에는 예리한 안목으로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종성 판관(鐘城判官)으로 좌천되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을 탄핵할 정도로 엄정한 기개를 유지하였다. 서명균은 결국 이수해의 탄핵에 의해 사직하였다. 이 일로 이수해는 강직한 언론 활동을 전개한 인물로 조정의 관리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1736년(영조 12)에 다시 지평으로 복직되었다.
1738년(영조 14) 정언으로 재임 중 “영남 사람들로 하여금 절의는 본받아야 하고 명교(名敎)는 침범하기 어려운 것임을 알게 하소서.”라는 말로, 안동에 김상헌(金尙憲)을 제향하는 서원의 건립을 주장하였다.
1740년(영조 16)에는 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임인년의 무안(誣案)[죄인이 거짓으로 꾸며낸 공초(供招)를 기록한 문서]을 다시 심사하여 김용택(金龍澤)·이희지(李喜之) 등의 억울한 죄를 신원하여 주도록 청한 것을 문제 삼아 유척기와 고인이 된 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耉) 등의 삭탈관작을 요구하였다. 그 뒤 사서(司書)·문학(文學)·사간(司諫)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