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7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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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埴 |
이칭/별칭 | 기지(器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조선 전기 천안에 우거한 문인·학자.
[개설]
이식(李埴)[1463~1502]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진사에 입격한 후 천안에 우거하며 학문과 후세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식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아들 이해(李瀣)와 이황(李滉)에게 이어져 큰 성과를 이루었다.
[가계]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기지(器之)이다. 고조할아버지 이자수(李子脩)는 고려 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통헌대부 판전의시사에 이르렀는데, 정세운(鄭世雲)을 따라 홍건적 토벌에 큰 공을 세워 송안군에 봉해졌고 왜구를 피하여 안동에서 살았다. 증조할아버지 이운후(李云侯)는 중훈대부(中訓大夫)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을 지내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이정(李禎)은 세종(世宗) 때 최윤덕(崔潤德)을 따라 모련위(毛憐衛) 정벌에 공을 세워 2급의 관작을 하사받고 선산 부사로 제수되었다. 아버지 이계양(李繼陽)은 1453년(단종 1) 진사에 합격한 뒤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로 이거하여 아들을 가르치고 글 읽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여러 번 추증되어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이르렀다. 어머니 영양 김씨(英陽金氏)는 부사직를 지낸 김유용(金有庸)의 딸인데,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문소 김씨(聞詔金氏)이며, 동생은 정국 4등 공신에 책봉된 이우(李堣)이다.
[활동 사항]
1501년(연산군 7) 진사시에 합격하였지만 이듬 해 39세의 일기로 요절했다. 이식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자녀에 대한 적극적인 훈육은 아들 이해와 이황이 크게 학문을 이루는 기틀을 제공하였다.
[학문과 저술]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질로 동생 이우(李堣)와 함께 학문에 열중하였다. 문소 김씨에게 장가들었는데, 장인인 예조 정랑 김한철(金漢哲)이 죽기 전 상당히 많은 책을 남겼는데, 장모 남씨는 사위가 학문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그 책을 모두 물려주었다. 이에 이식은 고경(古經)과 백가(百家)의 연구에 열중하였다. “나는 밥 먹을 때에도 글과 함께, 잠 잘 때에도 글과 함께, 앉아서도 글, 길을 걸을 때에도 글이었다. 글이라면 한 시 반 각도 마음에서 떠나본 적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이같이 유유히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이래서야 어찌 능히 다음날 성취되기를 바라겠느냐.”라며 아들들을 가르쳤다. 이식이 요절한 뒤에는 동생 이우가 조카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에 힘입어 이해와 이황 등 아들들이 학문을 크게 성취하였다.
[묘소]
안동시 도안면 온혜리 선영에 있다.
[상훈과 추모]
1544년(인조 1) 5남 이해(李瀣)의 덕으로 이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1568년(선조 1)에는 7남 이황의 덕으로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가증(加贈)되었다. 청계 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