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806 |
---|---|
한자 | 康好文 |
이칭/별칭 | 자야(子野),매계(梅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문철영 |
[정의]
고려 후기 천안 군수를 역임한 문신.
[가계]
자는 자야(子野)이고, 호는 매계(梅溪)이다. 부인 문씨(文氏)는 광주 갑향(光州甲鄕) 사람인데, 1388년(우왕 14) 왜구에게 붙들려가는 도중 몽불산(夢佛山) 극락암 근처에서 순결을 지키기 위해 절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이에 왜구는 그의 큰아들을 죽이고, 부인은 나무덩굴에 걸려 오른팔이 부러진 채 구출되어 『고려사』에 열녀로 입전되어 있다.
[활동 사항]
강호문(康好文)[?~?]은 생몰 연대가 미상이나 고려 공민왕에서 우왕 시기의 문신이다. 1362년(공민왕 11) 과거에 급제하여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냈으며,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의 『삼봉집(三峰集)』에는 「영주 강중정 시에 차운하다[次寧州康中正韻]」라는 시가 있으며, 이를 통해 강호문이 1373년(공민왕 22) 영주[천안군] 군수였음을 알 수 있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이를 헤아리면 그대가 높지만/ 교분은 내가 가장 친하고 말고/ 강산을 이별한 지 어느덧 십년/ 공부는 했지만 가난하다오/ 정사가 간편하니 백성은 안정되고/ 시 맑으니 세상은 모두 보배로 삼네/ 아마도 영각(鈴閣)은 문이 닫히어/ 긴긴 낮에 두건을 벗고 있으리” 이를 통해 강호문의 정사 및 시에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강호문은 정도전뿐 아니라 이색(李穡)·권근(權近) 등 신진 사류들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저술]
강호문은 천안 군수를 역임할 때 『남원루기(南院樓記)』를 찬하였는데, 1852년(철종 3)에 편찬된 충청도 천안군[현 충청남도 천안시] 읍지인 『영성지(寧城誌)』와 『동문선』에 전하고 있다. 『남원루기』에 의하면, 태조 왕건이 견훤과 싸울 때 군사 10만을 주둔시켰는데 그 주둔지를 고정(鼓庭)이라 하고 그 성을 왕자성(王者城)이라 했으니 영주[천안]을 설치한 것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천안과 태조 왕건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