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8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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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禹南陽 |
이칭/별칭 | 몽뢰(夢賚),운곡(雲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조선 후기 천안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본관은 단양(丹陽), 자(字)는 몽뢰(夢賚), 호는 운곡(雲谷)이다. 할아버지는 예조 판서, 아버지는 현령(縣令)을 지냈다. 우남양의 증손자 두 명이 천안(天安)에 살았는데,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고 전한다. 목사(牧使)를 지낸 우복룡(禹伏龍)이 종증손(從曾孫)이다. 천안의 군지인 『영성지』의 인물란에서 소개한 것으로 미루어 우남양이 천안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활동 사항]
조익(趙翼)이 지은 전(傳)에 의하면 우남양의 조상은 모두 경성(京城) 사람으로 집이 경성에 있었는데, 고학(古學)을 닦아 벼슬할 마음을 끊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본향인 평택에 살았으며, 일찍이 감찰(監察)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및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峸)과 친하게 지내 항상 왕래하였으며,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과도 서로 친하게 지냈다.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의 『일민전(逸民傳)』에도 “학행이 있었으나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독서한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 『영성지(寧城誌)』에는 기묘사화 때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등창이 나고 피를 토한 지 3개월 만에 70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