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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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弘淵 |
영어음역 | Yi Hongy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석린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정백(靜伯)·이정(而靜)), 호는 삼죽(三竹)이다. 아버지는 대사간 이덕수(李德洙)이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다.
[활동사항]
1624년(인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636년 의금부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뒤에 세마(洗馬)를 거쳐 시직(侍直)으로 병자호란을 만나 왕세자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 이듬해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간이 되어 조의(朝議)를 뿌리치고 조석윤(趙錫胤)과 함께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여 귀양 보내게 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1654년 부평부사로 있을 때 백성의 송사를 잘못해 유배당하였다가 풀려나 좌승지,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58년 대사간이 되고 예조, 병조, 형조의 참의등을 역임하고 부모 봉양을 위해 회양부사, 서천부사를 지냈다.
1670년(현종 11) 충청도관찰사에 이어 대사간과 호조참의, 승지를 역임하였다. 1673년에 형조참판에 오르고 이어 대사관, 경기도관찰사를 지내었다. 1675년(숙종 1) 대사간으로 특진관(特進官)을 겸직한 후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이해 김수항(金壽恒)을 변호하다가 삭직, 이듬해 다시 서용되었고, 1680년 의금부당상관으로 경신대출척의 옥사를 다스려 허목(許穆) 등을 숙청하였다.
그 뒤 다시 대사간을 거쳐 공조판서를 지내고 좌참찬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 후 1683년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사상]
조희일(趙希逸)·정홍명(鄭弘溟)·기옹(畸翁)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묘소]
충청북도 청주의 북쪽 30리 화승(花升)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