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8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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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戊申亂 |
영어음역 | Musinran (Yi Injwaui Nan) |
영어의미역 | Rebellion of Generals (Rebellion of Yi Injwa) |
이칭/별칭 | 신천영의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수연 |
[정의]
1728년(영조 4)에 소론(少論) 과격파들과 남인(南人)이 영조(英祖)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일으킨 난.
[발단]
1728년에 일어난 무신란은 노론(老論)이 지지하는 영조의 즉위로 위협을 느낀 소론의 과격파들과 남인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증손(曾孫)인 밀풍군 탄(坦)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충청도에서는 이인좌(李麟佐), 경상도에서는 정희량(鄭希亮), 전라도에서는 박필현(朴弼顯), 경기도에서는 권서봉(權瑞鳳)이 군사를 일으켰다. 이인좌는 1728년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북상하였으나,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었고, 청주에 남은 세력도 창의군에 의해 무너졌다.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거병하여 안음, 거창, 합천, 함양을 점령하였으나 역시 관군에게 토벌되었다. 호남에서는 거병 전에 박필현 등의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난의 진압에는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 등 소론 인물들이 적극 참여하였으나, 이후 노론의 권력장악이 가속화하였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경과]
청주성 함락이후 신천영(申天永)이 반란군의 병사(兵使)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청주지역에서는 무신란을 신천영의 난이라고도 한다. 신천영은 청주지역의 명가인 고령신씨(高靈申氏) 신경제(申慶濟)의 손자로 본명은 신복영(申復永)이다.
청주지역은 무신란에 제일 먼저 점령대상이 된 지역이었다. 청주지역은 충청도의 병영이 설치된 곳으로 이곳을 점령해야만 영남과 호남 군사가 모여 서울로 진격할 수 있으며, 전력보강과 전열정비가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1728년 3월초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란군은 안성과 양성에서 거병하여, 3월 15일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1676~1728],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1685~1728]을 죽이고 청주성을 함락했다.
반군은 각 창고의 전곡·미·포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민정강령을 내세움으로써 청주 백성의 참여를 유도하여, 청주의 군관, 향임층, 일반행려, 상인 등으로 반군세력이 확대되었다. 반군은 증평 청안, 천안 목천, 진천 등지를 점령하고, 수령을 파견하여 환곡을 분급하며 관노비에게 상급을 주고, 장정을 선발했다.
그런데 영남에서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李熊輔)가 3월 20일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거했으나, 경상북도 안동, 상주 입거에 실패하고 결국은 관군에게 패했으며, 호남에서는 박필몽과 박필현이 각각 괘서를 살포하는 등 취병을 했으나 태인거병이 좌절당한 뒤 잡혀 처형당했다.
또한 정부는 서울의 내응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면서 반군은 경중내응과 영남병·호남병 북상을 전략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군은 각 처의 유민, 소상인, 화전민을 포섭하면서 도성을 향해 진천을 지나 안성·죽산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3월 24일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어 이인좌, 권서봉, 목함경(睦涵敬)이 잡혔으며, 청주에 남아 있던 반군세력인 신천영과 이기좌(李麒佐) 역시 창의사인 박민웅(朴敏雄)에게 체포되었다. 이 소식은 영남·호남 지방에도 알려져 잔존했던 반군세력은 소멸되었다.
[결과]
무신란의 진압 이후에 난의 책임을 물어 청주목은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다. 또한 무신란에 청주영에서 목숨을 잃은 충청병사 이봉상,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731년에 삼충사(三忠祠)를 세웠으며, 1736년에는 표충사(表忠祠)라고 사액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