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4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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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院嶺戰鬪 |
영어의미역 | Battle of Daewonryeong Pa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미숙 |
성격 |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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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255년 10월 2일 |
종결연도/일시 | 1255년 10월 2일 |
발생(시작)장소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하늘재 |
[정의]
1255년(고종 42)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하늘재에서 충주 정예병이 몽고군을 크게 격파한 전투.
[개설]
대원령은 삼국시대는 계립령·마골재, 고려시대는 대원령, 지금은 하늘재라 불리는 고개이다. 지금의 충주시 남쪽에 있는 고개로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리적인 요충지이다. 이 때문에 대원령 일대는 충주 및 월악산과 연결되어 몽고군과의 중요한 격전지가 되기도 하였다.
[역사적 배경]
고려와 몽고가 처음 접촉한 것은 1219년(고종 6) 고려가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족을 평정할 때 몽고의 후원을 얻어 공동 작전을 취했을 때이다. 이 일을 빌미로 이후 몽고는 고려에 대한 은인을 자처하며 사신을 보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1225년 1월 몽고의 사자 저고여(著古與)가 고려에서 공물을 거두어 귀국하던 중 압록강 변에서 도적 떼에게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몽고는 이 사건의 책임을 고려에 물으며 국교를 단절하고, 이것을 구실로 1231년(고종 18) 8월 고려를 침입하기 시작하여 1258년 강화를 맺을 때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전국을 유린하였다.
고려는 몽고와의 장기전을 계획하고 이듬해인 1232년(고종 19) 서울을 강화도로 옮기고 여러 지역에 사자를 보내어, 백성들에게 적이 침입하면 섬이나 산성으로 옮기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때 몽고군을 맞아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싸운 것은 정부군이 아니라 각 지방의 향리와 농민, 천민 등이었다.
특히 충주는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내륙의 수륙 양면 교통 요지로서 경상도로 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그 때문에 충주는 몽고의 침입이 시작된 이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잦은 침입을 받았다.
[경과]
1255년 10월 2일 몽고군이 경상도 지역을 침략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북상하기 위해 소백산맥에 있는 대원령을 넘어옴으로써 전투가 벌어졌다. 명령을 받고 출동한 충주 정예병은 지리적 여건을 이용하여 대원령을 넘어 이동 중인 몽고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결과]
충주 정예병의 활약으로 몽고군 1,000여 명을 격살하는 대 승리를 거두었다.
[의의와 평가]
대원령 전투에서 격살된 몽고군의 수로 미루어 치열한 전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몽고군의 침입으로부터 내 고장을 지키고자 하는 충주 지역민의 강인한 투지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