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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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此奇 |
영어음역 | Hong Chagi |
이칭/별칭 | 양여(養汝),저한(箸漢)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 가정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미숙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양여(養汝). 모당 홍이상(洪履祥)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첨지중추부사 홍만최(洪萬最), 조부는 홍문관교리 홍중현(洪重鉉), 아버지는 홍인보(洪寅輔)이고, 어머니는 수원최씨이다.
[활동사항]
홍차기(洪此奇)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홍인보는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 수원최씨는 홍차기가 열 살이 되자 부자간에 상면이나 시키고자 아버지에 대한 사연을 비로소 알려 주었다. 홍차기는 크게 놀라며 즉시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 옥중의 아버지를 만나고 통곡하니 보는 이가 모두 애처롭게 여겼다.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를 잘 모시도록 일렀으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고생하는 아버지를 보고 어찌 돌아가겠습니까?” 하고 지극한 효성으로 옥바라지를 하는 한편 관가에 호소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그 효성의 소리가 왕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왕이 그 사실을 알고 직접 옥사를 처결하니 홍차기의 아버지는 다행히 죽음을 면하고 영남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처결도 사실은 억울한 일이었다. 홍차기는 아버지의 죄가 완전히 사면되도록 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도 불구, 유배지 영남에서 서울에 이르는 천여 리를 수없이 오르내리며 형조에 억울한 사정을 탄원하다 객지에서 병이 들어 눕게 되었다.
이러한 홍차기의 지극 정성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왕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인정하여 죄를 풀고 석방하였다. 그러나 홍차기는 아버지의 석방 사실도 모르고 병석에서 신음하다 뒤늦게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버지가 풀려난 소식을 전해 듣고 하늘에 감사드린 후 조용히 숨졌으니 이때 그의 나이 14세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홍차기의 지극한 효성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자 나라에서 정문을 세울 것을 명했으나 정문이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1795년(정조 19) 당시 충주목사였던 이가환(李家煥)이 내용을 쓴 비석과 보호각을 정려와 같은 형태로 세웠는데, 현재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