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0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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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廉德俊 |
영어공식명칭 | Yeom Deokju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석배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판소리 국악인.
[개설]
염덕준(廉德俊)[?~?]은 장자백(張子伯)[?~1907]의 문하에서 수련하다가 서편제로 개종하여 고종과 순종 대에 이름을 알린 서편제 명창이다. 장기는 「춘향가」와 「심청가」이고, 특히 「심청가」 중에서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공양미 300석에 몸이 팔려 인당수로 가는 대목에 뛰어났다. 염덕준은 염계달, 염계량 가문 출신으로 짐작된다.
염덕준의 출생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박황의 『창극사연구』에는 염덕준이 1865년 전주에서 출생하였다고 하였으며, 정노식의 『조선창극사』가 출판된 1940년에 생존하고 있었다.
[활동 사항]
염덕준은 원각사(圓覺社) 시절 김창환과 송만갑, 이동백, 강용환, 유공렬 등과 함께 『춘향전』과 『심청전』을 창극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원각사는 원래 1902년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에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극장이며, 1908년 7월 박정동과 김상천, 이인직 등이 임대하여 원각사로 개관하였다. 원각사의 단장은 이동백이고, 사장은 요식업계의 태두였던 안순환이며, 김창환 등 명창 40명과 가기(歌妓) 24명 등 64명의 배우를 두었다.
염덕준은 원각사가 해산되자 시대의 변천을 따라 광대 생활을 그만두고 대구광역시에서 편안하게 여생을 보냈다.
[저술 및 작품]
염덕준은 원각사 시절 김창환, 송만갑 등과 함께 『춘향전』과 『심청전』을 창극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