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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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南銀·白南奎孝子旌閭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Monument House for the Filial Piety of Baek Nameun, Baek Namgyu |
이칭/별칭 | 백남은·백남규 효자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용연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학로 |
건립 시기/일시 | 1892년 - 백남은·백남규 효자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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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백남은·백남규 효자 정려 - 충청남도 당진시 용연동 |
성격 | 효자 정려 |
양식 | 한옥 홑처마 우진각 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용연동에 있는 효자문.
[개설]
백남은(白南銀)[?~?]과 백남규(白南奎)[?~?]는 수원 백씨(水原白氏) 백낙헌의 6형제 중 셋째와 다섯째 아들로 당진 용연리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였는데 슬퍼하는 것이나 장례를 치르는 예절 등이 어른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저녁마다 홀로 계신 어머니의 이부자리를 살피고 새벽에는 문안을 드렸으며, 여름철 날이 무더우면 부채질을 해 드리고 한겨울에는 찬 이부자리 속에 누웠다가 따듯해지면 어머니를 주무시게 하였다. 어머니가 노환으로 위독하자 백남은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살려냈고, 3일 후에 다시 숨을 거두려 하자 백남규가 또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어 이틀을 더 살게 하였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형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잠시도 어머니 산소 곁을 떠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통곡하며 3년을 보냈다. 인근 마을 사람 모두가 형제를 칭찬하며 군수와 암행어사에게 이 일을 알렸다. 당진 현감이 감동하여 효자문을 세우게 하였다.
[위치]
백남은·백남규 효자 정려는 충청남도 당진시 용연동에 있다.
[형태]
백남은·백남규 효자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홑처마이고 우진각 지붕[네 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이다. 덤벙주초[자연석을 가공하지 않고 주춧돌로 사용한 돌] 위에 둥근기둥을 올렸으며 사면에는 홍살을 설치하였다. 정려각 안에는 명정 현판이 있고, 그 뒤에 정려기가 있다. 효자비 받침돌은 화강암이고 비석의 몸체는 오석이다.
[의의와 평가]
한집안에서 형제 간에 우애가 깊고 효성이 지극하였다는 것은 충효를 중시하는 유교 사회였던 조선 시대 향촌 사회에서 큰 귀감이 될 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