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4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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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秉周孝子門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Monument House for the Filial Piety of Choe Byeong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남석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7년 7월 - 최병주 효자문 현판 하사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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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932년 - 최병주 효자문 건립 |
현 소재지 | 최병주 효자문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산64-1 장동 마을 |
원소재지 | 최병주 효자문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산64-1 장동 마을 |
성격 | 정려 |
양식 | 한옥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간 |
측면 칸수 | 1간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최병주의 효자문.
[개설]
최병주(崔秉周)[1872~1952]는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534번지에서 태어났다. 최만보라고도 한다. 최병주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장가든 동생이 일찍 사망하자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 집을 바라보며 울었다. 어느 날 동생 집을 볼 때마다 안타까우니 안 보이게 옮겨 달라고 하였다. 최병주는 어머니가 볼 수 없도록 언덕 너머에 더 좋은 집을 마련해 제수와 조카들을 살게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최병주는 묘소 근처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어머니 묘소에 가서 곡(哭)을 하였다. 최병주는 오도항 개펄을 간척하여 5정보(町步)의 논을 일궜지만 이곳에서의 수입으로 오도항을 출입하는 나그네와 거지들을 재우고 여비를 주어 내보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최병주의 효행과 선행은 인근은 물론이고 중앙에도 알려졌고, 당진군 선비들이 건의해 성균관의 이름으로 송산면 당산리에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짓게 되었다. 최병주 효자 정려는 최병주가 살아 있을 때 세워졌으며, 당진 교육청에서도 최병주의 효행을 교육 자료로 활용하였다.
[위치]
최병주 효자문은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당산리 산64-1 장동 마을에 있다.
[형태]
최병주 효자문은 중앙과 옆면이 각 1간이다. 지붕 양식은 맞배지붕이며 처마를 겹으로 지었다. 시멘트로 기단을 만든 뒤 8각의 기둥 돌을 놓고 둥근기둥을 세웠다. 효자문의 사방에는 홍살을 둘렀다. 상량문에는 ‘공부자 탄강 이천사백팔십삼년 임신 이월 초사일 상량(孔夫子誕降 二千四百八十三年壬申二月初四日 上樑)’이라고 쓰여 있다. 효자문은 1932년 2월에 세운 것이다.
현판은 효자문 안의 뒤쪽 벽에 걸었고 현판 오른쪽에 사진을 매달았다. 또한 후면 양 모서리에는 나무로 깍은 봉황이 중앙을 향하도록 설치하였다. 현판에는 ‘효자 경주 최병주지문 선성묘사무소립 공부자 탄강 이천사백칠십팔년칠월 일(孝子慶州崔秉周之門 先聖廟事務所立 孔夫子誕降二千四百七十八年七月 日)’이라 기록되어 있다. 현판은 1927년 7월에 받은 것이다.
내부 중심에는 ‘경주 최공 병주 효행비(慶州崔公秉周孝行碑)’라 쓰인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비석 뒤편에는 최병주의 효행을 한문으로 새겨 두었다. 또한 우측면에는 김헌규가 글을 짓고 안만수가 글씨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석은 1932년 4월에 세운 것이다.
효자문 뒤편에는 손자인 최장신이 1987년 12월 31일에 최병주의 효행을 한글로 정리한 현판을 걸어 두었다. 이 현판을 보면 최병주 효행비를 1927년 7월에 세웠으며 정만조(鄭萬朝)가 글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석을 보면 1932년 4월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현판을 받은 것은 1927년 7월이고 정려를 세운 것은 1932년 2월이며, 효행비는 1932년 4월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현황]
최병주 효자문은 산기슭의 정남향에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최병주 효자문은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효자이기도 하지만 이웃을 위한 선행도 몸소 실천한 최병주의 효행과 선행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