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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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如蘭 |
영어공식명칭 | Gim Yeor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남석 |
몰년 시기/일시 | 1627년 - 김여란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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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김여란 출생지 - 평안도 귀성(龜城) |
묘소|단소 | 김여란 묘소 - 충남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374-2 |
사당|배향지 | 송령비 - 충남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374-2 |
성격 | 열녀 |
성별 | 여 |
본관 | 연안(延安)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열녀.
[개설]
김여란(金如蘭)[?~1627]은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남편 남이흥(南以興)[1576~1627]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임신 중이었음에도 자결한 열녀이다.
[가계]
김여란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평안도 별마절도사를 지낸 충장공(忠壯公) 남이흥의 부실(副室)[첩]이다.
[활동 사항]
김여란은 평안도 귀성(龜城) 사람이다. 조선 후기 충장공 남이흥의 부실이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당시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국경 방어의 임무를 맡고 있던 남이흥은 안주성에서 적을 맞아 항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어 전사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김여란은 만삭의 몸으로 서울에서 자결하였다. 당시 김여란의 나이는 24세였다고 전한다.
김여란이 자결하자 정충신(鄭忠信)[1576~1636]은 만사(輓詞)를 지어 김여란의 묘비에 새겼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사어군첩사부(夫死於君妾死夫)[남편은 임금을 위하여 죽었고 아내는 남편 위해 죽었으니], 일가전절세진무(一家全節世眞無)[한 가문의 온전한 절개는 세상에 참으로 없는 일이로다], 광릉남반유쌍총(廣陵南畔留雙塚)[광릉 남쪽에 쌍무덤이 있으니], 천고행인기창우(千古行人起悵吁)[만고에 지나는 길손이 슬픔을 일으키겠구나]"
[묘소]
김여란의 묘는 원래 남이흥의 묘와 함께 경기도 성남에 있었다. 하지만 묘역이 도시 확장 과정에서 개발되자, 1971년 7월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374-2 충장사 옆에 있는 현재의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묘역은 2단으로 조성되었다. 윗단 좌측에는 의천 부원군 남유의 묘를 합장으로 안장했고, 우측에는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묘를 합장으로 조성했다. 하단에는 3기의 묘를 조성했는데, 맨 우측의 묘가 남이흥의 부실인 김여란의 묘다. 가운데에 묘비가 있고, 양 옆에 동자석이 세워져 있다.
[상훈과 추모]
남이흥 장군 관련 문화 행사를 시행할 때 함께 제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