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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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松沈氏 |
영어공식명칭 | Cheongsong Simsi|Cheongsong Si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남석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678년 - 청송심씨 당진 입향조 심봉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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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750년 - 청송심씨 당진 입향조 심봉채 사망 |
본관 | 청송(靑松) - 경상북도 청송군 |
입향지 | 청송심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본당리 쇠머리들[우두] |
세거|집성지 | 청송심씨 당진 집성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반촌리 |본당리|방계리|광명리 |
묘소|세장지 | 청송심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본당리 쇠머리들[우두] |
성씨 시조 | 심홍부(沈洪孚) |
입향 시조 | 심봉채(沈鳳彩) |
[정의]
심홍부가 시조이고 심봉채가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청송심씨는 고려 시대의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에는 16세 심봉채(沈鳳彩)[1678~1750]가 낙향한 이래 300년 가까이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당진 지역의 청송심씨는 주로 송악읍 광명리·방계리·본당리에 거주하고 있다.
[연원]
우리나라에서 심씨 성의 연원을 상세히 설명해 주는 문헌은 없다. 단지 『원류보(源流譜)』라는 옛 문헌에 "심충(沈忠)은 고려 때 중윤(中尹)[지방 관청의 하위직 벼슬]을 지냈고 그 아들 공좌(公佐)[일명 현좌(賢佐)]는 국자감 진사, 손자인 수정(守貞)도 국자감 진사를 지냈으며 증손인 홍부(洪孚)는 문림랑위위사승(文林郞衛尉寺丞)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원류보』의 근거가 분명치 않아 청송심씨 문중에서는 심홍부를 1세로 하고 있다. 청송심씨 족보에는 심홍부의 생몰 연대나 자세한 행적이 나타나 있지 않고, 묘소가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덕동리 보광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송심씨는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문과 급제자가 188명, 무과 급제자는 380명에 이른다. 정승에 오른 이가 13명인데, 이는 전주 이씨[22명], 안동 김씨[19명], 동래 정씨[17명]에 이어 네 번째이다. 특히 영의정 9명, 대제학 2명, 판서 36명, 관찰사 47명, 왕비 3명, 부마가 4명이라 조선 시대 청송심씨의 정치적·사회적 지위는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세계는 시조 심홍부의 증손자인 4세 심덕부(沈德符), 심원부(沈元符) 형제에서 크게 갈린다. 조선 시대 초기에 좌의정을 지낸 심덕부의 후손은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벼슬을 지냈고, 동생인 심원부의 자손들은 새 왕조의 벼슬을 마다하고 두문동에 들어간 심원부의 유훈을 지켜 대대손손 고향에 살면서 벼슬을 멀리하였다. 현재 경상북도 청송군을 비롯하여 영남 일대에 퍼져 사는 심씨들이 대부분 심원부의 후손들이다.
한편 ‘서울집’이라고 불리는 심덕부 집안에서는 대를 이어 가며 수많은 저명인사를 배출하였고, 특히 심덕부의 아들 7형제에서 자손이 번성하여 7개 파로 크게 나뉜다. 그중에서 넷째 아들인 인수부윤공(仁壽府尹公) 심징(沈澄)의 후손과 다섯째 아들인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1375~1418]의 후손이 가장 번성하였다. 특히 심온은 세종의 장인으로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 아들인 심회(沈澮)도 영의정을 지내 부자 영상(父子領相)이라 하였다. 심덕부까지 넣으면 3대가 정승을 지낸 셈이다.
당진시 송악면 반촌리, 본당리, 방계리, 광명리에 세거지를 이루고 있는 청송심씨도 심온의 자손인데, 특히 심온의 맏아들로 세종 때에 보국영중추원사(輔國領中樞院事)를 지낸 심준(沈濬)의 후손들이다.
[입향 경위]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는 청송심씨는 16세 심봉채를 입향조로 하고 있다. 심봉채는 효종 대의 인물로 이조 참판에 증직된 심한필(沈漢弼)의 아들이다. 족보에 따르면 심봉채는 파계로는 첨정공파(僉正公派)에 속하는데, 첨정공은 10세손인 심자(沈鎡)[1518~1578]이다. 심봉채의 당진 입향 경위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서울 지역에 살다가 아버지 심한필이 사망한 뒤인 1723년 이후에 심봉채가 낙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심봉채의 당진 입향 후 후손들이 송악읍 광명리, 방계리, 본당리로 확대되어 살게 되었다. 청송심씨는 현재 송악읍 반촌리에 5호, 광명리에 5호, 방계리에 8호, 본당리에 5호 정도가 살고 있으며 종가는 방계리에 거주하고 있다. 모두 23호에 50명 내외가 거주하고 있는 셈이다.
당진 입향 이후의 청송심씨 첨정공파 후손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면서 살아왔는데, 통덕랑(通德郞)이나 생원을 지내면서 지역 사회 토호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교육계에 진출하여 교장을 역임한 심한섭·심진섭이 있고,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는 심재필 외 많은 후손들이 사회 각 방면에 진출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관련 유적]
청송심씨 당진 입향조인 심봉채의 묘소는 아버지 심한필의 묘소와 함께 함께 송악읍 본당리 쇠머리들[우두]에 조성되어 있다. 제향은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