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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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나영 |
[개설]
서울특별시 도봉구는 1970년대 전태일(全泰壹)을 시작으로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앞당긴 인물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준 지역이다. 도봉구에는 1970년대 전태일, 1980년대 함석헌(咸錫憲), 1990년대 계훈제(桂勳梯) 등 한국 사회 민주화의 주역들이 거주하였다. 이들은 도봉구에 거주하며 지역 사회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였고, 도봉구는 이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다. 이들 민주화 인사들의 영향으로 도봉구는 다른 지역에 비해 민주화에 대한 높은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 덕성 여자 대학교·한국 역사 연구회 등 교육·학술 기관과 연계된 지역 운동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1960년대 도시화와 고단한 서민들의 이주]
1963년 도봉구 지역은 행정 구역 확장으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서 성북구[성북구 노해 출장소 관할]로 편입되었지만 여전히 서울의 외곽 지대에 불과했다. 당시 도봉구 지역은 도심 지역의 인구를 수용하는 한편, 농촌에서 올라온 인구를 수용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다보니 1962년에서 1970년까지 도봉동, 창동, 쌍문동, 정릉동, 상계동, 중계동, 번동, 공릉동, 영등포구 일대에 판잣집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급격한 도시화에 따라 서울은 과잉 인구 밀집 지역이 되었고, 도심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잡지 못한 영세민들은 서울의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도봉구 지역은 기존의 무허가 불량 주거지에 더 많은 도시 영세민들을 수용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도봉구 지역은 산업화의 빛에 가려진 가난한 이들의 쉼터가 되어갔다.
[청년 전태일이 꿈을 키운 곳]
도봉구가 처한 지역적 성격 때문인지 도봉구에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던 민주 인사들이 다수 거주하였다. 도봉구의 민주 인사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바로 전태일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전태일은 민주주의의 암흑기라고도 할 수 있는 1970년대에 민주화, 노동 운동의 불꽃을 지핀 인물이다. 전태일은 1948년에 대구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전태일은 17세의 나이로 서울 청계천 평화 시장에 미싱사 보조로 취직하였다. 14시간 노동을 하며 당시 차 한 잔 값이던 일당 50원을 받았는데, 자신보다 더 어린 나이에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전태일은 1968년에 우연히 근로 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고,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전태일은 1969년에 ‘바보회’라는 노동 운동 조직을 결성해 현재의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는 활동을 펼쳤으나 사업주들의 탄압으로 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다. 1970년에 ‘바보회’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삼동 친목회’를 조직하여 노동 실태를 조사하는 한편, 사업주들과 맞서 노동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던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근로 기준법 화형식에서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을 하였다. 당시 전태일이 분신으로 목숨을 잃기 전까지 고된 몸을 잠시나마 뉘여 쉴 수 있었던 곳이 바로 도봉구 쌍문동 56번지였다.
[어머니 이소선이 새롭게 태어나다]
이후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李小仙)은 남은 아들 내외와 함께 2011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집에서 거주하였다. 어머니 이소선 역시 아들 전태일의 분신을 계기로 노동 운동가로서의 새 삶을 살게 되었다. 1971년에 동화 상가에 ‘후생 식당’을 개업하고 노동자를 위한 국수 삶기를 시작하였고, 1973년에는 청계 피복 노조 노동 교실을 설립해 인근 노동자의 배움터를 마련하였다. 1985년에는 민주화 실천 가족 운동 협의회를 설립해 공동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의문사하거나 그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억울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1986년에는 전국 민주화 운동 유가족 협의회[유가협]를 창립하여 1993년까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89년에는 유가협 회원들과 함께 135일 동안 의문사 진상 규명 농성을 벌였고, 1998년에는 의문사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법 제정을 위한 422일 천막 농성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전국 해고자 협의회 지원 운동 등을 열정적으로 주도하면서 재야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반독재 투쟁가 함석헌의 안식처]
도봉구의 또 다른 대표 민주 인사로는 함석헌이 있다. 함석헌은 일제 강점기부터 기독교 사회 운동에 가담한 인물로, 해방 후에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그는 ‘씨 사상’이라는 비폭력·민주·평화 이념을 제창한 종교인이자 언론인으로 한국 사회 민주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함석헌은 1956년에 『사상계』의 논객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5·16 군사 정변 이후에 3선 개헌 반대 운동, 유신 반대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고, 이 때문에 수차례 투옥되었다.
이후 1980년에는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씨의 소리』는 강제 폐간되었다가, 1988년 12월에 복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4년에는 민주 통일 국민회의 고문, 1985년에는 민주 쟁취 국민운동 본부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함석헌은 1982년부터 1989년 2월에 타계할 때까지 도봉구 쌍문동 81-78번지에 거주하였다.
[흰 고무신의 재야 정치인 계훈제가 잠든 곳]
마지막으로 도봉구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라고 불리기도 한 계훈제가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계훈제는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쉼 없이 펼친 정치인이자 언론인이다. 계훈제는 해방 직후에 서울 대학교 문리 대학 학생회장을 지내면서 반탁 운동, 국립 대학 설립안 반대 투쟁 등을 이끌었다. 1960년대부터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하였는데,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1963년 한일 회담 반대 운동, 월남전 파병 반대 운동, 삼선 개헌 반대 운동이 있다. 함석헌과 함께 1970년부터는 잡지 『씨알의 소리』의 편집 위원을 맡아 언론인으로도 활약하였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1975년 긴급 조치 9호 위반 혐의로 투옥되는 등 늘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특히 1980년에는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5개월 동안 도피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계훈제는 1980년대에도 재야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서 활동하였는데, 특히 허름한 민복에 흰 고무신 차림으로 대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하였다. 1985년에는 민주 통일 민중 운동 연합[민통련]의 부의장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1987년 민주화 항쟁 당시에는 전국 민족 민주 운동 연합[전민련]의 상임 고문, 1991년에는 민주주의 민족 통일 전국 연합 상임 고문 등을 맡아 활동하는 등 온 생애를 재야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였다. 계훈제는 1990년 5월에 도봉구 방학동 612-30번지로 전입하여 타계할 때까지 이곳에서 거주하였다.
[한국 민주화와 도봉구]
도봉구는 이처럼 유수의 민주화 인사들이 민중과 함께 투쟁하고 일상을 함께하였던 곳이다. 도봉구는 1960년대 이래, 가난한 도시 영세민이 거주하고, 이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준공업 지대가 발달하였던 곳이다. 1980년대 수도권 정비 계획으로 도봉구에 아파트 단지가 개발되기 전까지 달동네 판잣집이 즐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도봉구의 지리적 특성이 어쩌면 민주화 인사들을 모이게 했는지도 모른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산업화로 경제 성장의 성과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노동자, 도시 빈민의 희생이 존재하였다. 그들에게 더 이상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경제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독재가 용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다수의 민주화 인사들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였다. 도봉구는 민주화 인사들이 쉴 수 있는 쉼터이자, 그들이 대면해야 할 민중들이 기거하는 곳이었으며, 한국 사회 민주화의 씨앗이 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