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6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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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英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우택 |
[정의]
도봉 지역에서 피난길에 오른 국왕을 알현한 고려 전기의 문신.
[개설]
고영기(高英起)는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고려 목종(穆宗) 대부터 현종(顯宗) 대까지의 활동상이 전해지는 인물이다. 많은 자료가 전해지고 있지는 않으나, 남아 있는 기록에 보이는 활동상은 고영기가 당시 정계에서 적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료에 나타나는 고영기의 활동은 크게 현종의 즉위 과정 개입 및 거란과의 전쟁 수행으로 나뉜다.
[활동 사항]
현종의 즉위 과정과 관련된 내용은 『고려사』의 채충순(蔡忠順) 열전 및 『고려사절요』 목종 12년조의 기사에 나타난다. 당시 국왕이었던 목종은 병환이 심해져 후계자 선정에 고심하고 있었다. 특히 목종의 모친인 천추 태후(千秋太后)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김치양(金致陽)의 권력 탈취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었다. 이에 목종과 측근 신하들은 태조(太祖)의 손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을 옹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있던 고영기가 왕과 뜻을 같이하는 채충순, 최항(崔沆), 유충정(劉忠正) 등의 신하들 사이를 오가며 의견을 전하고 계획을 논의하여 결국 대량원군이 고려의 8대 국왕인 현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영기의 역할은 주목할 만하다.
고영기가 다시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거란과의 2차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1010년(현종 원년)의 일이다. 고영기는 중군 판관(中軍判官)으로 전쟁에 참전했으나, 패하고 남쪽으로 후퇴를 하였다. 당시 강조(康兆)가 이끄는 고려 중앙군의 패전으로 인해 국왕 현종과 신하들은 수도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고영기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하공진과 만나 도봉사(道峯寺)에 머무르고 있던 현종을 알현하였다. 하공진은 왕에게 “거란이 본시 역적을 정벌한다는 구실로 출병하였는데 이제 이미 강조를 잡았으니 이때에 사신을 보내 강화를 제의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철퇴할 것이라”고 하고는 거란과의 화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사절로 자신을 파견할 것을 자청하였다. 이에 왕은 1010년 12월 하공진과 고영기를 거란에 사절로 파견하였다.
거란의 성종(聖宗)은 하공진과 고영기의 주장을 받아들여 회군을 결정하였으나, 하공진과 고영기는 거란군에게 억류되었다. 하공진과 고영기는 고국에 돌아갈 것을 모의한 뒤 거란 왕에게 “우리나라는 이미 망하였으니 우리들이 군대를 인솔하고 가서 점검하고 돌아오겠노라”라고 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고려 왕이 국도로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은 거란 임금은 고영기를 중경(中京)에, 하공진을 연경에 거주하게 하고, 혼인도 시켰다. 이후 하공진은 거란을 탈출하여 고려로 돌아갈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밀고를 당하여 사전에 발각되고 거란 왕의 회유를 거절하여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고영기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를 않아 그 뒤 고영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