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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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喜燮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류정선 |
[정의]
개항기 서울특별시 도봉구 출신의 의병.
[개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각지에서 국가의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 봉기는 1895년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의해 일어난 을미 의병과 마찬가지로 최익현(崔益鉉), 기정진(奇正鎭), 허위(許蔿) 등 저명한 유생들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하지만 이들 유생들은 국왕의 군대에 대항해 싸울 수 없다는 생각에서 스스로 관군에 잡히기도 하고, 일본의 진압 작전에 의해 진압되어 버리는 등으로 인하여 곧 투쟁 대열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에 대신해 무명 유생들이 새로운 의병장으로서 등장하였다. 1907년에는 일본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면서 다수의 군인들이 의병 전쟁에 동참하게 되어 의병의 전투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활동 사항]
윤희섭(尹喜燮)은 1881년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현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태어났다. 윤희섭이 참가한 연기우(延基羽) 의병 부대 역시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창설되었다. 의병장 연기우는 원래 강화 진위대(江華鎭衛隊)에서 부교(副校)로 복무하고 있었는데, 1907년 일제의 책동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통분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연기우는 1908년 2월 이후에는 허위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조수연(趙壽淵)·김규식(金奎植)·김연상(金演相) 등과 함께 경기도 파주의 적성(積城) 방면에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대외적으로 협력 세력 규합을 위하여 경현수(慶賢秀)를 중국 혁명당에 밀파하고 전국적인 의병 연합 세력의 규합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6월에 의병 총대장 허위가 체포되고 10월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자 연합 의병 부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908년 가을 이후에는 강기동(姜基棟) 의병 부대와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다. 점차 일본군의 대처가 강화되어 가자 부대 구성을 소수 정예 부대로 편성하여 게릴라전으로 전환시켜 1910년까지 유대를 잃지 않았다. 1909년 8월 이후에는 대체로 철원·연천(蓮川)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의병 항쟁 재판 기록을 살펴보면, 윤희섭은 원래 농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30세라고 하여 1881년생으로 추정된다. 재판 기록에 1908년 1월부터 죄목이 열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908년 1월 이전에 연기우 의병 부대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영평군(永平郡), 포천군(抱川郡) 및 강원도 평강군(平康郡), 철원군(鐵原郡) 일대에서 활약하며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금하거나 조달하고, 친일 밀정(密偵)들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5년 형을 받았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