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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092
한자 道峯書院
분야 종교/유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산길 90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579년연표보기 - 도봉서원 설립
해체 시기/일시 1871년연표보기 - 도봉서원 훼철
현 소재지 도봉서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산길 90[도봉동 512]지도보기
성격 서원
설립자 남언경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는 서원.

[개설]

도봉서원(道峯書院)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 512번지에 있는 서원으로, 서울 시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조선 시대의 서원이다. 1573년(선조 6)에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부임한 남언경(南彦經)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는 뜻으로 도봉서원을 건립하고 이듬해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후 도봉서원은 300여 년간 서울·경기 지역 선비들의 주요 교유처가 되었으나, 고종 대에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1970년대에 복원을 통하여 3칸 정도 되는 사우(祠宇)와 3개의 문이 남아 있고, 조광조송시열(宋時烈)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으나 2011년부터 다시 복원 사업에 들어갔으며, 2014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도봉서원 주변 계곡에는 조선 시대 문인들이 남긴 글씨들이 새겨진 바위들이 많다. 도봉서원과 그 주변 유적들에 대한 기록은 조선 후기 주요 문인들의 문집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설립 목적]

도봉서원은 조선 시대 서울·경기 지역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서원이다. 서원의 건립자는 양주에 목사로 부임했던 남언경이다. 남언경이 1573년 도봉서원 건립을 시작했을 때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사류들이 조정에 대거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해 나가면서 기묘 사림의 복권과 훈신(勳臣)의 축출이 완료 되어가던 때이다. 남언경은 기묘 사림의 우두머리인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도봉산영국사(寧國寺) 터에 서원을 영건하고 조광조를 제향하였다. 도봉서원의 설립은 선조 대 이후 사림이 학문적, 정치적으로 급성장하면서 헤게모니를 잡아가던 분위기를 반영한다.

[변천]

도봉서원의 공역이 시작될 때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사류들에게 통문이 널리 발해지는 등 전국적인 규모로 서원의 영건이 진행되었으며 1579년(선조 12) 완성되었다. 공역을 주도한 인물은 부제학이었던 허엽(許曄)·좌참찬 백인걸(白仁傑)·이조참판 박소립(朴素立)조광조의 문인들이었다. 이 중 허엽은 서원 공역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주변 선후배 사류들에게 재정 지원을 부탁했고, 서원의 규령(規令)을 제정했다는 기록이 이이가 지은 『도봉서원기』에 있다.

또한 서원 건설이 진행되던 1574년 9월 조정에 있던 부제학 유희춘(柳希春) 등이 도봉서원의 사액을 청하였다. 이에 대해 선조는 도성의 근처에 있고, 당시 문제가 되던 서원 첩설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으려 했지만 여러 사림들의 청원에 결국 ‘도봉’이라는 사액을 내려주었다. 사액을 받은 도봉서원에는 막대한 전답이 지급되었는데, 본래 영국사에 소속되어 있던 전지 외에도 호남의 면세지 100여 결이 추가 지급되었다. 이후에도 조광조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경제 지원이 이루어졌다.

도봉서원은 건립 이후로 서울과 그 주변 지역의 명사들이 계속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으며, 유력 가문 자제들의 수학처, 학문 토론 장소로 이용되었다. 특히 효종 대 이후부터는 송시열·김상헌(金尙憲)·이단상(李端相)·권상하(權尙夏)·윤봉구(尹鳳九)·김수항(金壽恒)·김창협(金昌協)·박세채(朴世采) 등 서인 사류들이 많이 다녀갔고, 노론과 소론의 분기가 이루어진 이후에는 도봉서원을 둘러싸고 정치적 대립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송시열도봉서원 향사 여부를 둘러싼 노·소 간의 논쟁이 그것이다. 송시열은 1696년(숙종 22) 도봉서원조광조와 나란히 배향되었지만, 1723년(경종 3) 출향되었다가, 1725년(영조 1) 재배향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775년(영조 51)에 영조가 ‘도봉서원(道峯書院)’이라는 현판을 친필로 써서 내리면서 도봉서원은 친필 사액 서원이 되었고, 문묘에 배향된 조광조·송시열 양현(兩賢)을 모시는 명실상부한 최고 서원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興宣 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현황]

1903년 도봉서원 주변 유림들은 서원의 제단을 정비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1970년 양주 향교 전교(典校) 남궁복(南宮墣)을 중심으로 도봉서원 재건 위원회를 조직하고 서울 유지들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서원의 동북쪽에 서향으로 사우를 다시 건립하여 조광조송시열을 병향(並享)하고 그 앞에 신삼문(新三門)을 세웠다. 그러나 서원을 옛날 모습처럼 완벽하게 중건하지는 못하였다.

도봉서원의 건물과 그 배치는 3칸의 사우와 신문(神門)·동협문(東夾門)·서협문(西夾門) 정도만 존재하게 되었으나, 남아있는 여러 기록으로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여러 서원들은 북쪽에 사우가 있고 그 앞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양쪽으로 마주보며, 남쪽에 서원이 있고 그 가운데에 강당(講堂)이 있으며 양쪽에 협실이 있는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도봉서원도 이러한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면서, 지형을 이용해 서원 주변 계곡가에 행랑(行廊)을 마련하고 문을 만들었다.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서울특별시 도봉구가 총 면적 4,129㎡ 터에 2011년도 복원사업을 추진하던 중 금강령, 금강저 등 유물들이 출토되어 3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이후 도봉 서원의 복원 및 활용방안 마련을 위해 2019년부터 2021년 3월까지 도봉 서원 터 종합정비계획 용역을 추진하였다. 현재 복원을 위한 전문가 자문 및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받기 위해 도봉서원 복원안에 대한 상정을 추진 중에 있다.

[의의와 평가]

도봉서원은 조선 시대 근기 지역에 가장 먼저 세워진 서원으로, 서인 명사들의 학업과 교유에 큰 기여를 했던 곳이다. 또한 문묘에 배향된 조광조송시열을 향사하던 곳으로, 국왕에게 친필 사액까지 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치적 의미가 큰 곳이기도 하였다. 현재 서울 지역에 남아있는 서원은 도봉서원이 유일하기 때문에 서울의 단 하나뿐인 전통 교육 기관으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5.13 내용 현행화 2011년부터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2020년 현재 유·불교가 상생을 이루는 종합정비계획을 수립중에 있으며, 2022년까지 도봉서원 복원 사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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